대통령 후보 선두주자에 징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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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의 대통령선거엔 여러 가지 징크스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너무 일찍부터 선두주자가 되면 망치기 쉽다』는 것.
과거 공화당 지명전에 선발주자로 기선을 잡았던 롬니가 너무 일찍 부산을 떨다가 『월남에 가보니 군장성들의 주장에 세뇌를, 받게끔 됐더라』고 실언(?)을 해 쪽박을 깬 일이 있다.
그와 비슷한 케이스가 될지도 모를 사건이 최근 워싱턴 정가에 파문을 던지고 있다. 이름하여 머스키 설화사건이란 촌극.
작년 11월 중간선거(상·하 양원 및 주 지정 선거) 전야의 TV연설로 일약 차기대통령선거의 민주당 후보감으로 각광을 받아온 머스키 상원의원은 일찍부터 인기의 정상을 달리며 세계순방이다, 사전 선거운동이다 해서 남달리 앞장서 독주해오던 터였다.
그렇던 재빠른 토끼가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진 흑인지도자들과의 면담에서 그만 너무 정직한 탓으로 뜻밖의 암초에 부딪치고 말았다. 『당신은 흑인을 러닝·메이트(부통령후보)로 지명할 생각은 없느냐』고 한 흑인대표의 질문에 대해 고지식한 머스키는 정색을 하고 『그럴 생각은 없다. 미국국민들은 아직 흑인 부통령을 받아들이게끔 돼있지 않다』고 직언 했던 것이다.
말이야 분명한 말이다.
그는 사실을 사실대로 지적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흑인 민권운동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느 흑인 지도자는 오히려 『그의 솔직한 의견에 경의를 표한다』고 까지 말했다.
단지 당선을 고려해서 그것이 불리한 전법임을 말한 것뿐이다.
그러나 정치란 무섭고 냉정한 것. 백악관은 옳다 꾸나하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닉슨으로서는 아킬레스의 건을 잡은 셈이다.
닉슨 행정부의 흑인관료 프레처 노동차관이 『흑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민주당 유력 인사가 그따위 망언을 하기냐』고 대든데 이어 닉슨 대통령 자신이 16일 기자회견석상에서 이 문제를 끄집어냈다.
『종교·인종·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후보자를 차별한다고 말한 것은 미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특히 일반인이 아닌 지도급인사가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라고 머스키 발언을 정치문제화 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가 당선되고 매사추세츠 주에서 흑인의원 브루크가 나온 사례를 지적했다.
이건 머스키에 대한 흑인의 반발을 조장하고 나아가 가톨릭 신자인 머스키의 종교적 입장까지를 새삼스레 환기시키려는 작전일 듯.
어쨌든 머스키로 서는 매우 난처한 기습에 직면했다. 그의 사무실은 뒤늦게 『차제에 흑인 출마 문제를 공식으로 토론해 보자』면서 차기에 정말로 흑인 러닝·메이트를 고려할 듯한 반응도 슬쩍 보였지만, 과거에 흑인민권에 비협조적이었다는 평을 들은 닉슨한테 오히려 반 흑인파라는 공격을 당한 머스키의 상처는 쉬 가셔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중론이다. <유근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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