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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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을은 소리의 계절이다.
어수선한 도심의 한 귀퉁이에서도 땅거미가 지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 씻은 듯이 귀를 맑게 하는 소리. 삐르르·삐르·삐르·삐르르…. 의성어가 풍성한 우리말로도 미처 옮길 수 없는 소리이다.
가만히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온 세상은 그 귀뚜라미 소리로 가득 찬다. 하찮은 풀벌레들도 무슨 개성이 있는지 좀 운치를 내는 축도 있고, 그냥 담담하게 소리를 내는 벌레도 있다. 하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리들이 멀고 가까이에서 화음을 이루는 소리는 사뭇 별천지의 교향악이다.
옛 시구들을 음미해 보아도 가을의 시엔 으레 무슨 소리가 등장한다. 당 시인 이백은 장안엔 일편의 달이 걸려있고 가을바람은 우수수 부는데 『만호파의성』이라고 읇조린다. 옷을 다듬는 다듬잇 소리.
중국 당시의 왕자 격인 두보의 시는 언제나 애조가 곁들여 있다. 공연한 슬픔이 아니라, 인정의 허무함, 세상사의 무상함이 그 심저를 이룬다. 그는 가을이면 원숭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늙음과 불우를 한한다.
『바둑판처럼 변하는 서울소식. 백년세사, 그 슬픔을 누를 수 없구나…두보는 이 『추흥』에서 북녘의 북소리(금고)도 듣는다. 안록산의 난을 입어 장안(서울)은 7년을 사이에 두고 그 주인이 네번이나 바뀐다. 수런거리는 세정에선 북소리마저 애절하게 들린다.
『과일 떨어지는 소리』·『등잔불 아래서 풀벌레 우는소리』·『맑은 샘물 돌 위에 흐르는 소리』…. 이것은 모두 왕유의 가을 소리들이다. 장안의 종남산 기슭 별장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탐닉해 있던 이 시선의 세계는 오늘의 세속인으로는 알듯 모를듯하다.
「한소」라면 「차가운 비단」이라는 뜻이다. 이하(791∼817)는 바로 귀뚜라미 우는소리를 「한소」로 비유했다. 이하라면 『몽읍생백두』(꿈속에서도 백발이 되는 것이 슬퍼 눈물을 흘렸다)를 읊은 당 시인이다. 꺼져 가는 등잔불(쇄등) 아래서 한소를 들으며 눈물을 교직한다(편).
소 두보라는 두목(803∼853)의 피리소리, 귀족시인 위응균(737∼790?)의 기러기소리, 몽득 유우석(772∼842)의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는 모두 가을 시에 등장하는 음향이다. 『삐르·삐르르·삐르….』
배기「개스」·소음·자지러지는 전자음향·경적소리·소방차·「앰브런스」소리·호각소리·알 수 없는 고함소리·급「브레이크」의 충격음…이 문명의 비명 속에서 오로지 자연의 소리라고는 귀뚜라미 소리뿐인 도시의 소슬함. 그나마 소중한 자연의 「메시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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