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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체험 없는 품사의 나열|고은<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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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정주 시론은 「이디엄」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 이론은 기본적으로 승인된다. 그에게 있어서 「이디엄」은 <한 민족의 오랜 체취가 침투해 있는 말>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한민족 전체 생활의 특징 속에 관류해 오는 언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만난 아들이 그가 배운 근대적 개념어로 인사할 수 없다라는 상시에 도달한다. 또한 한국의 재래적 「이디엄」에 <존재><형성><의미> 따위와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시의 언어가 관념화·추상화·전문화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말함으로써 「이디엄」을 반증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 문제는 반드시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정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시를 쓰는 일은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실생활의 관용어는 물론 시의 개념에 있어서 모국어로 환치된다. 시인이 모국어로부터 유리될 때 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결정적일수록 도리어 시를 일상 생활의 표현 수단으로 잘못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나 문학에 있어서의 언어는 일상 언어에 견주면 마치 사물에 대한 「이마주」와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일련의 의문형으로 말하는 「M·브랑쇼」의 『문학공간』을 통해서 시의 언어와 일상 언어가 분리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서정주의 위대한 시들도 한국 민족의 「이디엄」 체험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불교적 세계 인식과 관련된 언어도 사실상 시간을 부여하지 않을 때 일종의 외래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비일상적인 특수 용어를 전체적으로 구사하는 시인인 것이다. 그와는 달리 현대시가 언어와 자의적인 혼란·난삽성으로 나타날 때 일군의 자연발생적인 시인이나 삼류 이론의 주장에 의해서 독자의 편에서 거부되는 것은 차라리 50년대 후반기파의 사이비 시론과 일부 60년대의 편집적인 논의가 보이는 패덕보다 더 구원받을 수 없는 패덕이다.
그리하여 시가 교과서 수록의 시처럼 인생의 의미·진실 따위로 만족하지 않고 시의 무의미·무위야말로 얼마나 시의 근원에 이르는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은 그 자신의 시를 모른다>는 참다운 시의 난해성이 가진 비결과 만날 수 있다. 시의 난해함을 거의 무지몽매하게 부정하는 입장에 대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그리스 명제가 아직도 풀지 못한 인류의 명제라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시야말로 난해해야 한다. 다만 시가 난해하다는 것은 그 시가 사이비라는 의미와 함께 처리되는 오류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달의 「인플레」언어에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시의 난해명제를 모독하지 않았다.
신석정의 『원정의 설화』(창작과 비평)는 그 자신으로서는 역작으로 발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산문이다. 정결한 문체를 가진 수필가가 편지를 쓰는 경지에 지나지 않는다.
시역 40년의 시인에 의한 작품이 시와 산문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촛불』 『슬픈 목가』에 의해서 그의 전원시는 사설어조·산문시로 정립되었으나 그것은 50년대 이후 그의 어법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일련의 주지적 「인텔리아」 또는 관념어를 우직하게 도입함으로써 시의 파산을 초래한 것이다. 그럴 경우 그의 어법이 붕괴하는 것은 물론, 그의 재래적인 어법 자체도 그것이 확고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검증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원정의 설화』에서 그것이 산문이라는 혹평 밖에서도 극복된 것은 아니다. 제1화의 30년대 「프롤레타리아」적 비애 압입이 의도적이라는 사실과 제2화의 <비오는 날에는 댓잎에 떨어지는 「쇼펭」의 전주곡 15번 같은 빗소리>따위, <시방><일로 이사오던…>따위, 그리고 <시나대><맥문등><태산목> 따위의 식물 도감적 명사 따위가 전혀 구체적인 체험을 거치지 않은 품사로서 배열되었다.
박목월의 연작시 『사력질』(문학과 지성)은 18편의 시가 모여진 것이다. 청록파라는 공허한 행운으로 문학「저널리즘」에 애용된 그의 시가 하나의 중견적 결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작품에 대해서는 김종길의 목월론이 상술했다는 것을 전제로 면밀한 축조 비평은 가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언어가 이상할 정도로 긴급·절박해 졌다는 점과 언어를 단어로 압축시킬 때 그 단어에 과중한 「이미지」를 의탁한 파는 점이 그의 특질을 이루고 있어서 그의 자연·인생만의 세속이 미학적으로 거부된 사실이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심각할수록 경음악이 된다.
김남조의 『백기』(현대시학)는 여류30인집이라는 특집을 제선하고 있다. 강은교 노향림을 제외하면 여류시의 가능성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을 때 김남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수식어는 거의 진부한 종교적 희어이거나 정서적 조어인 것이다. <아슴한><무애의><표백하는 서리서리 내 몸서리><그 까닭과 까닭의 말씀까지><억만실오리><정백의><이제금><승복하는 지고의…>는 그의 철저한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한다. 그의 수식어는 그의 생리라고 볼 경우에 어떤 변칙도 위험하다.
그를 비롯해서 이번의 여류 시를 본 뒤 시인의 여성적 영혼은 여류시인이라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최민의 『잔인한 꿈』(월간중앙)은 독특한 현실 부정의 쾌감을 만들어 낸다. 일단 그것은 사상의 단편·단층을 나열한 것이 되지만 기묘한 상상 세계를 현실에 가학적으로 요구하고 「이미저리」의 다의성에 의한 현실 전사를 시도한다. 이 시는 폐쇄음의 요소가 서로 충돌함으로써 반대로 원환의 유음을 이루고 있다. 「이미지」시의 한 모범이다.
정희성의 『유두』(문학과 지성)는 이달의 우수한 업적이다. 민속을 고전적으로 제고시켜서 그것이 죽음 또는 희망을 유전의 우의로 포착한다. 그의 고루한 몇 개의 둔사를 제외하면 거의 놀라운 감수성과 조화되고 있다. 일종의 오문적인 자기조형으로서의 <버드나무 아직도 어두운 가지에>, 현학적인 <은유의 여자>, <산발한 우리들의 잠 깊은 머리칼에 불을 지른다>, 거만한 수묵화의 육감으로서의 <넓은 잎 청순한 잠은 흔들거리고> 따위의 아름다움은 지나치게 단련된 유려체에 입각하고 있다. 국문학적 교양이 시의 형식을 성공시켜 준 좋은 예를 그는 남겨 주었다.
석지현의 우수한 시가 화답 시를 벗어나서 시단에 본격적인 것으로 남겨질 때 그것을 언급하려는 의도를 부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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