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이작·스턴」 바이얼리니스트|이재헌<국향악장·바이얼리니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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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이작·스턴」하면 우선 미국을 대표하는 「바이얼리니스트」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가 성장한 과정에서의 미국에서는 세계적인 대가는 나오지를 않았으나 「아이작·스턴」의 출현으로 새로운 미국이 부각됐을 때 많은 미국시민들은 이미 명성을 가지고 미국에 귀화한 많은 연주가들보다 「아이작·스턴」을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스턴은 1920년 러시아의 그레미츠에서 태어나 양친과 함께 곧 미국으로 이주, 처음엔 성악가인 모친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나 8세부터 바이얼린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샌프코란시스 음악원에 입학해서 정통적인 기법을 습득한 후 「뉴요크」로 가 메뉴인의 스승인 「루이스·퍼싱거」에게 사사했다.
1937년 「뉴요크」에서 데뷔한 이래 구미를 중심으로 연주여행을 했으며 우리 나라에도 1967년 내한공연을 가진바 있다.
독주가로서 전 세계에 알려진 스턴이 근래에 실내악에 정진하고 있다는 외지보도를 읽고 매우 흥미있던 차에 중앙일보 초청으로 이번에는 실내악을 연주하러 내한한다고 하니 매우 뜻있는 연주회가 될 것 같다.
스턴은 데뷔했을 때 기교 위주인 역감적인 연주 경향이었으나 20대 후반부터는 많은 비평가들이 세계 최고의 「바이얼리니스트」중의 한사람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러 가지 수식어로 장식되어진 그의 화려한 명성은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내연하는 정신적 욕구를 독주라는 형태에서 보다 내면의 깊은 예술형식으로 이루어진 실내악에서 승화시키려는 강한 욕구감에 사로잡힌 노년 문턱에 들어선 것 같다.
우리는 때로 현실을 외면하는 예술가롤 주위서 자주보곤 하지만 스턴은 정면으로 이에 도전하는 듯한 말을 남기고 있다. 즉 그는 『예술가는 고독한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크게 달라져 가고있다』라고 하면서 예술가의 적극 사회참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이러한 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한때 유명한 카네기·홀이 폐쇄위기에 처했을 때 각계에 호소해서 기금을 모아 오늘날까지 계속 음악의 전당으로서의 권위를 지속시키는데 앞장섰다는 얘기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한 단면을 알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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