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와 창악>
l902년(고종황제 광무6연) 가을 고종 등극40년 칭경예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그 예식장소로 건설된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동시에 국립극장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창악계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로는 최신식설비를 갖추어 규모는 작으나 영국 「런더」의 「로열」극장, 「오스트리아」 「빈」의 왕립극장과 비교할 수 있는 국립극장이 되게 하자는 것이 원각사의 건립의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원각사에서 처음 공연하기로 되었던 것은 물론 가극40년의 경축 행사였었다. 이 행사의 준비를 담당한 궁내부는 구 관할하에 「협률사」란 단체를 만들어 여기 창우들로 하여금 가무를 연습하도록 했다고
그러나 1902년 가을로 예정되었던 경축식전이 「콜레라」의 유행으로 이듬해 봄으로 연기되었다가 영친왕의 두창으로 다시 가을로 미뤄지더니 그해 가을에는 흉작으로 민심이 흥흥했고 노일관계도 험악하여 예식은 명색뿐인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후의 원각사는 협률사 일파와의 흥행 연예장화하여 영업적 국장이 되었으나 2년쯤 더 지속되었을 뿐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원각사의 구조는 무대. 계단식 관람석·인막·준비실 등을 갖추었으며 건축양식은 「로마」식이었다. 여기서는 대체로 재담 따위가 공언되었으나 사실상 이때부터 다섯바탕의 판소리가 창극화하여 빈약하기는 했지만 백포를 배경으로 제법 장치를 갖춘 무대 예술로서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무렵 원각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명창들은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을 주축으로 정정렬 박춘재 등 남자명창들과 이화중선 김녹주 등 여류명창들이었다.
사실상 창악의 초연화는 이때부터 성숙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적을 둔 여류명창들이. 기생으로서의 수입을 외면하고 공연수입으로써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들은 대체로 공연단체를 만들어 부산 대구 대전 등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대중들에게 크게 인기를 모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후 장안사 연흥사 광무대 등이 설립되었고 공연단체도 많이 생겼는데 이들 단체의 단 원수는 모두50명 이상씩이었다.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는 여류명창 중 박녹주 김여난 김소희 등이 대략 이 무렵 어린 나이로 이들 공연단체를 통해 활약했다. 특히 김소희가 요즘 말로 「데뷔」하게된 뒷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다.
당시 13세였던 김소희는 시골에서 명창 송만갑에게 열심히 소리를 배우고 놨었다. 어느날 그 지방에 공연차 내려와 있던 이화중선애 지난날의 스승인 송만갑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송만갑이 거거하고 있던 집을 찾아왔다.
송만갑의 방에는 김소희를 비롯하여 송만갑에게 창을 배우던 많은·소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인기절정이던 이화중선을 부러움이 가득찬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가 끝난 후 송만갑은 이화중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주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화중선에게 보여줄까. 하지만 보고 난 다음에 달라고 하면 안돼.』
이화중선이 달라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송만갑은 쪼그리고 앉아있던 김소희를 불러냈다. 그리고 창을 하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김소희가 목청을 가다듬고 자신있는 것을 한 곡조 부르자 이화중선은 송만갑에게 김소희를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송만갑은 약속했던 사질을, 상기시키면서 이화중선을 달랬으나 마침내 못이기는 체하고 김소희를 이화중선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그늘에서 명창을 향해 줄달음질 치게된 것이다.
이화중선은 여류명창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남긴 명창가운데 한사람이다. 이화중선은 1895년 부산에세 출생, 17세 때 전북남원으로 출가했으나 출가직후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창악계에 투신할 것을 결심, 몰래 집을 빠져나와 어느 무당의 집에서 창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남원에서는 장득주란 사람이 창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이화중선은 그에게 창을 배우고 싶었으나 접근할 방도가 없어 마침내 장득주의 동생인 장혁주와 부부관계를 맺음으로써 장득주에게 접근하여 창을 배울 수 있었다.
장득주로부터 창을 배워 꽤 높은 경지에까지 다다르자 이화중선은 장씨 형제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즉시 서울로 올라와 한성권번에 들어갔다. 여기서 이동백 송만갑 등 당대 명창에게 사사한 후 일반공연에 나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것이다. 이화중선은 1943년 일본에 공연하러 잤다가 사고로 물에 빠져 죽었는데 말년의 그는 몹시 불우하여 아편에 중독 되었고 사후에도 친남매들로부터 버림받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이화중선과 같은 연대에 활약한 김녹주 신금홍도 이화중선과 비교할 만큼 높은 인기를 모았고 이들 또한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데 이들 둘은 똑같이 30세를 넘긴지 얼마 안돼 쓸쓸히 죽었다. <계속>계속>원각사와>
(254)<제 18화>명창주변|박헌봉(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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