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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제자는 필자|제17화 양화초기(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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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심사위원>
예나 지금이나 신인발굴을 위한 공모전에는 심사위원이 항시 말썽이다. 개인적인 정실과 작품에 대한 기호가 심사에 작용되는 까닭이다.
선전 초기에는 일본 화단의 이른바 권위를 형성하는 제전심사위원들이 나와 돌봐주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즘」의 정통파-종래의 격식을 보수하려는 데서 자연 규약적인 작품을 선정하기 마련이요, 그 점에서는 틀에 박힌 관료였다.
그러나 곧 재야 「그룹」인 이과회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후반에 이미 「마네」 「모네」 「드가」에서보는 초기인상파의 경향이 한물가고, 「세잔」을 거쳐 「마티스」 「블라망크」 「루오」등 갖가지 주장에 의한 표현의 유파가 흘러들어 싹트고 있었다. 물론 양화 그 자체가 채 정착되지 못한 한국에까진 그 물결이 미칠리 없고, 또 식민지백성으로 그들 심사위원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된다. 하지만 선전에 출품하는 일인들 사이에는 심사위원들의 경향이 필시 문제됐을 것이다. 제전사람들이 너무 「아카데믹」하다는 비난은 시대적 반응이요, 요청이기 때문이다.
선전 말기에는 이 이과회 사람마저 고루하다 하여 춘양회 사람들과 다시 교체되었다. 말하자면 미술계의 제 이야당 사람들이다. 제국미술회를 비롯한 이 세 「그룹」은 당시 일본의 당당한 미술단체들이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작품경향도 서로차이가 있었다.
7회인가 8회 선전을 앞두고서였다. 한국에 와있는 일인화가들 중심으로 「선전불출품동맹」, 즉 선전 「보이코트」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가담한 한국인 화가는 행인 이승만씨뿐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보이코트」이유는 심사위원을 모두 일본에서 모셔올게 아니라 재야작가도 참여시키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바꿔 말하면 선전에서 자라난 특선 및 무감사 급의 작가에게도 심사의 자격을 부여하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주무관서인 총독부학무국에서는 개인접촉을 하는 한편 회의를 소집해 설득하등 그 수습에 법석을 떨었다.
그 결과 동양화가인 「마쓰다」 「가다야마」 「가도소링」등 대다수는 번의, 자신이 심사위원이 되려는 저의만을 드러내고 다시 출품하였고, 경성일보미술기자 다전, 제2고보 교사 좌등, 매일신보소속 삽화가 행인 등은 끝내 출품을 거부하곤 말았다. 이러한 사건은 금석이 여일한 느낌이다. 오늘날의 국전에서도 선전 때의 문제가 거듭 되풀이되고 있으며, 제도 면에서나 사후처리에 이르기까지 탈피한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구습의 악순환이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주무관청의 자세이다. 어찌했든 그때 설왕설래가 심한 관전이니 만큼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전람회 임박하여 뻔질나게 회의를 열었다 중견화가와 말빨이 센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무렵 일부일인 화가들은 총독부가 정책적으로 입선작 수를 한국인·일인 반반씩 뽑도록 압력을 가한다고 「루머」를 퍼뜨렸다.
그것은 한국인 작품이 수준미달인데도 안배하고 있다는 비난일뿐더러 한국인에 대한 모멸의 표시였다. 이에 격분한 한 한국인 화가는 그 회의에 나가 『그게 사실이냐?』고 학무국장에게 따졌다. 국장은 물론 얼굴이 하얗게 질려 허둥지둥 부인했다.
1930년 전후하여 한국에 와있던 일인화가로는 수년동안 「프랑스」에 있다가 귀국한 도변호삼, 이과회회원인 삼목홍, 제전에서 활약하고 있던 좌등정일, 그밖에 원전운웅, 산전신일 등이 있고, 제전심사위원인 신정완을 비롯해 안등자 간변시웅 같은 사람들이 개인전을 개최하곤 하였다. 그 중에도 재한 일본사람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작가는 공예작가로 선전미술고문이었던「아사까와」(천천화방)씨.
우리 나라 고 미술품과, 특히 민예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아사가와」씨는 회령자기와 청화백자를 구워 발표하는가하면 산수화와 화조도 곧잘 흉내냈다. 심지어 그는 그림의 액자와 장막 및 공예품을 올려 놓는데까지 취미를 살리고 한국적인 정취를 담으려하여 한국사람들에게 퍽 호감을 주었다.
그의 동생은 명동에서 일찍부터 화구상을 차리고있었다. 그전에는 일한 서방이라는 일인경영의 문방구점에서 화구를 취급하고 있었는데 「천천화방」은 맨 처음의 화구점이 될 것이다. 지금도 명동에서 화구상을 하고있는 민씨는 어려서부터 여기서 일하던 분이다. 일제시대 유일한 이 화구상은 말하자면 모든 화가가 들러 화구를 사고 또 액자를 맞추기 때문에 화단의 거점이기도 했다. <계속> 【이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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