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아닌 시행착오 … 창업보다 재도전에 더 힘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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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고정기기를 개발한 강지훈(40) 강앤박메디컬 사장이 30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재도전 컨퍼런스’에서 창업 실패 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재도전하라”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20개국에 지사를 둔 글로벌 기업. 의료기기업체 강앤박메디컬의 강지훈(40) 사장의 꿈이다. 첫발은 이미 내디뎠다. 그는 올해 중국과 터키에 현지법인을 세웠다. 하지만 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집을 팔아 전셋집을 얻고, 다시 월셋방으로 옮기고, 결국은 가족이 찜질방 신세를 졌다. 그는 “창업과 함께 끝없는 내리막길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대구 사업가 강 사장이 30일 서울에 왔다.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다. 그는 이날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1회 재도전 컨퍼런스’ 연단에 섰다. 한국판 ‘실패 컨퍼런스(Failcon)’가 열린 것이다.

미국에선 페일콘이 5년 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날 행사는 중소기업청과 대한상의 등이 함께 열었고 230여 명이 참석했다. 작은 규모의 실패 경험 공유 모임이 열린 적은 있지만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실패가 사회적 재산이 되는 전환점이 되는 행사”라고 말했다.

 사례 발표를 한 강 사장은 2005년 공기청정기 업체를 창업했다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다른 창업자처럼 그도 처음엔 ‘되는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다중이용시설에 환기시설을 권고하던 시점이었고, 공학 박사 학위에 기업 근무 경험 5년, 오랫동안 교류를 맺어온 7명의 선후배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창업해 보니 주주 간 이견을 조율하는 어려움, 자금과 매출 압박 등이 생각보다 컸다”고 말했다. 그의 창업 빚에 부모는 30년간 보유하고 있던 땅을 팔아야 했다.그러나 실패는 자산이 됐다. 생체재료공학을 전공한 그는 우선 자신이 잘 아는 의료기기 분야를 사업 아이템으로 선택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심사관으로도 일했다. 의료기기는 식약처 허가가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연구원으로 최신 기술 동향도 익혔다. 준비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중소기업진흥공단 청년창업사관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재창업에 도전했다. 그는 “재도전을 위해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사업계획서를 최소 수십 번은 고쳐야 한다”며 “고정관념에 갇혀 있지 말고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카멜레온이 돼라”고 조언했다.

 토론자로 콘퍼런스에 참석한 알루미늄 제조·유통업체 스탠다드펌의 김상백(33) 대표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창업에 도전해 세 번의 도전 끝에 성공했다. 그는 ‘의논할 수 있는 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창업자는 모두 자기 사업에 확신을 가진다. 그래서 친척 돈까지 끌어온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곳이 있어야 한다. 또 기업인은 기업의 문제를 외부에 말하기 어렵다. 그런 얘길 들어주는 지원 조직이 있어야 한다.”

 이날 행사에선 실패 수기 시상도 있었다. 모두 재기에 성공한 기업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신용불량자 잔치’이기도 했다. 케이피전자의 여장부 박승자(54) 대표는 외환위기 때 도산했고, 2007년엔 사업 확장을 하려다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연대보증으로 갓 서른이 넘은 큰아들까지 신불자가 돼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새 출발을 하려면 과거에 잘났던 것도, 잘못했던 것도 깨끗이 잊는 힐링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애완용품 전문업체 쿠나이앤티의 강준배(40) 사장은 용어부터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는 “실패가 아니라 시행착오라고 불러야 한다”며 “이번 행사가 인식을 바꾸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 도전을 하고 있는 그는 두 번째 창업 후 “사장이 신불자라 대출이 안 되니 서류상 대표이사 이름을 잠시 빼달라”는 투자자 요구에 속아 회사를 한순간에 날리기도 했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창업 활성화보다 더 중요한 건 재도전 활성화”라며 “실패의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며 재도전 기회를 주는 건 인적자산과 경험자산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한상의 박종갑 상무는 “기업가정신이 위축된 데는 성실한 실패를 용인하지 않고, 실패 후 재기가 어려운 여건에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글=김영훈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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