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제자는 필자>|<제17화>양화초기(1)|이종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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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양화가 이종우씨는 금년 73세의 노화 백으로 1898년 황해도 봉산의 부호 가정에서 태어나 평양 고보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수학하였다. 그는 1925년 미술공부를 위해 당시 서양화의 본고장인 라틴에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요, 「프랑스」의 권위 있는 미술전「살롱·도톤」에 입선, 각광을 받았다. 한국인으로 서양화도입 초기의 작가는 이 화백에 앞서 3, 4명이 있으나 모두 사고했고 이 화백이 생존한 가장 원로이다.
현재예술원회원이며 홍 대 명예교수. 북한산 속에 은거하여 조용히 작품제작을 하고 있다.

<편집자 주>

<환장이·도화선생>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내가 동경으로 떠난 것은 1918년. 사회적으로도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유학 가는 것조차 우습게 여기던 시절이요, 하물며 집안에서 안다면 도저히 용납 안 되는 때의 이야기이다.
이조후기에 단원 겸 재·긍 재·오 원과 같은 출중한 화가(당시 국가에서 길러낸 화원) 가 적지 않지만 한말에 있어서「환장이」란 도무지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신분이 못 되었다.
그러한데 행세하는 집안의 자제가 그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겠다면 그야말로 가문의 창피요, 어른들은 길길이 뛰다못해 몸져누우실 일이다.
그 방면에 굳이 재주가 있다면 선비생활의 여가에 문인 화를 치는 것으로 족하며 그건 도리어 자랑이 된다.
내가 동경으로 가면서 미술을 지망한다는 내색을 할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미술학교 2학년말까지도 까맣게 속이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법과에 다니는 척하기 위해 방학에 귀성해서는 상책 위에 법률서적 한 두 권쯤 놓아두는 게 예사였다. 3학년이 돼 비로소 실토했는데도 어른들의 꾸중은 여간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절망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하다.
당시 그림을 지망한 사람들은 대개 그러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도 학교(고등보통학교 시절에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이 직접적인 연유이다. 중학과정인 평양 고 보에서 나에게 영향을 준 도화선생은「후까미·요시오」라는 일인이다. 막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온 것으로 기억되는「후까미」선생은 어린 소견에 굉장한 그림 장 이로 우러러 보였고 그가 데리고 다니며 사생시키는 게 퍽 즐겁기만 했다. 그 도화선생이 한번은 방과후 나와 몇몇 소년을 부르더니 다짜고짜로 모란봉에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웬 신사가 커다란「캔버스」 를「이젤」위에 뻗쳐놓고 대동강·모란봉·을밀대를 화폭에 옮겨 담는데 참 잘 그렸다.
찐득찐득한 물감을 척척 이겨 바르는데도 실제 경치보다 오히려 아름다운 게 아닌가. 동양화만을 대해오던 눈에는 영 희한하고 부럽기만 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는 당시 일본미술계의 중견인「다까기」화백. 철도국의 촉탁으로 초빙돼 와서 한반도의 여러 명소를 순회하며 작품을 제작 중이었다. 그때 그린 그의 작품은 근래까지 서울역이나 조선「호텔」같은데 걸려 있는걸 볼 수 있었다.
한-일 합방 후, 그러니까 신교육이 시행된 이후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도화(미술)와 창가(음악)를 반드시 가르치게 돼 있었는데 그때 서양식교육을 받은 선생이 문제였다. 특히 도화는 동양화로는 안되고 서양화를 할 줄 알아야만 되는데 한국인으로 서양화를 아는 사람이 없어 공립학교에선 일인사범학교 출신이기 마련이다. 1910년대에 서양화를 할 줄 아는 한국인 도화선생이라면 아마 서울중앙학교의 고희동씨 뿐이었으리라.
원래 동양화는 서양학에 있어서와 같은 사생이 없으며 서양화도입이후에 비로소 사생하는 풍조가 생겼을 것이다.
학교에서 도화시간에 석고「데 상」을 하거나 혹은 화병이나 자기 손을 그리게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석고상을 희랍의 조각을 석고로 모작한, 요즘 쓰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것을 연필로 그리거나 잘한대야 목탄을 쌌고 그 재료는 도화지에 이르기까지 일체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러다가 상급학년이 되면 수채화도 배웠다. 내가 4학년 때 서울에서 열린 공진회에 몇 학생의 수채화 합작 품을 출품했다. 그런데 그게 입상되자 학교에서는 아주 대견한 듯 칭찬이 자자했다. 이것이 나의 미술지망에 한층 용기를 북돋워 준 것이다.
그러나 미술공부를 하기 위한 동경유학이란 무작정 떠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때 일본에서는 정책적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관비로 유학시키는 형편이므로 대학에 입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입학준비로서 몇 개월 혹은 1년 남짓 그곳에서 사설학원을 다닐 따름이다. 내 경우엔 먼저 경도로 가 관서 미술 원에서 1년간「데 상」을 익히고 입학했다.
동경미술학교 선배인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제씨도 같은「케이스」이며 나보다 하급반이었던 장 발·이병규·공쇄영·도상봉 씨들도 역시 그러했다. 한국인 유학생에 대하여 정규시험을 통해 입학시킨 것은 1925년께, 이마동씨 부 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무렵엔 동경미술학교에 10여명의 유학생이 있었고 그 활동도 가장 활발했을 것인데 마침 내가「프랑스」로 떠나버려 그들의 활동 상을 목격하진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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