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남과 북의 포로수용소(9)|박 백 중위의 경우(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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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는 처음부터 포로를 자기네들 전력강화를 위한 인적자원으로 보고「제네바」협정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폐인이 된 자를 제외한 모든 포로를 980과 502의 두「노무부대」에 편입, 후방 보급로 공사에 강제 취 역 시켰다. 노무부대는 분대장까지 북괴정규군으로 임명돼 있어 철저한 통제와 감시로 강제중노동을 시켰다. 휴전회담이 개최된 후부터는 한사람이라도 송환을 막기 위해 회유와 위협으로 끈질긴 세뇌공작을 전개했다. 이런 생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과 그후의 세뇌공작에 견디어내고 끝내 생환한 포로들의 육체와 정신력은 가히 초인적이라 할만 했다. 그럼, 전회에 이어 다시 박 백 중위의 증언을 들어보겠다.

<아카시아 나무 잎 국 먹고>

<51년 6월에 신 안주에서 하역작업을 시키는데, 이때 포로가 된 후 처음으로 국이라는 것을 먹어보았어요.「아카시아」나무 잎을 말린 것인데 그래도 살 것 같습디다.
7월 중순에 미군비행기에서 휴전회담에 관한 소식을 알리는「비라」를 뿌렸어요. 그걸 보니 갑자기 생에 대한 애착이 치솟데요.
이때까지는 본의는 아니더라도 북괴에 동조하던 포로들도「비라」를 본 후부터는 태도가 싹 달라지더군요. 작업 중에는 조금도 휴식시간을 안 주어요. 잠시 쉴 때에도 소위 건설 가를 합창시키거나 신문을 가지고 속보 회를 시키곤 합디다..
휴전이 성립될 때를 생각해서 우리는 포로수용소로 보내달라고 들고일어났어요.
지금의 우리입장은 그네들이 말하는 소위「해방전사」의 노무부대이니까 이점을 그자들이 또 어떻게 악용할지도 모르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그자들은 한민족인데 우리는 포로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요. 참 기가 막힙디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포로수용소로 보내달라고 항의도 하고 투쟁도 했어요. 우리부대를 다시 압록강변으로 이동시키더니 여기서는「리어카」로 기름통을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요.
이때는 미군폭격이 심해서 하루에도 5∼6회씩 공습경보가 났어요. 북괴 병들은 미 F-86기를「문패비행기」라고 합디다. 문패를 보고 폭격하듯이 저공으로 내려와 정확히 때린다는 뜻이죠. 북괴군은 모두 중공군복강을 하고 82㎜「스탈린」포로 대공사격을 하더군요. 고사 포 사수는「비행기 사냥꾼 조원」이라고 해서 영웅시합디다.

<휘발유 2만 드럼 폭격 당해>
그후 청천강 부근으로 내려와 휘발유 나르는 작업을 했어요. 이때 모래밭 속에 묻은 휘발유가 폭격을 맞아 2만여「드럼」이 한꺼번에 타버린 일도 있었어요. 안주에 나가 작업하던 3중대가 돌아와 우리부대는 민가에 분산 수용됐어요. 민가에는「두 문」이란 팻말이 붙은 집이 많아요. 알고 보니,「두 문」은 가족 중에 월남자가 있거나 그들로부터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의 집이 예요. 안주와 영변에는 민가의 3분의2 정도가 「두 문」이란 팻말이 붙어 있습디다.
이런 집은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고, 우리와도 접촉시키지 않더군요. 일은 점점 더 고되어 갔어요. 분대장까지가 괴뢰군이니 잠시도 쉴 수가 있어야지요.> 이 작업이 얼마나 중노동이었는가를 다른 한 증인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필동씨(당시 6사단2연대 행정 반 하사· 현 충북도 교위 재무 과 직원·41) <50년 10월26일에 구장근처에서 일행 30여명과 함께 중공군에 잡혔어요. 그후 북괴군에 인계되어 벽 유·강계·우 시·천마·평양의 사 동·외 귀·만포 진·황 주 등 수용소로 끌려 다니면서 온갖 시달림을 받으며 중노동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양 사 동 수용소에 있을 때 중환자의 몸으로 비행장을 닦던 일은 잊을 수가 없어요. 낮에는 미군폭격이 심하니까 밤에 꼬박 12시간씩 중노동을 했어요. 이때가 51년 2월인데 영하 10여도의 강추위에 대동강 바람은 사정없이 몰아치고요. 나는 환자여서 그래도 경노동을 시킨다고 자동차에 모래를 싣는 일을 시킵디다.
하루는 몸이 아파서 도저히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어 소대장한테 가서 사정을 했어요. 그자는 사상이 틀려먹었다면서 일을 계속하라는 거예요. 나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니까 노발대발하면서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나는 그 자리에 나자빠지고 말았어요. 이때 한 전우가 달려와서『저 한 동무는 환자로서 저녁식사도 못 먹고 나와 그대로 두면 생명이 위험하니 숙소로 보내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그랬더니 소대장은 이번에는 이런 자를 변명해주는 당신이 수상하다는 거예요. 그 친구는 더 말을 못하고 사라집디다.

<수용소 보내달라 버티고>
나는 정말 이대로 죽는 게 훨씬 편하다는 생각에서 차가운 모래밭에 그대로 누워 있었어요. 거의 정신을 잃고 한참 있는데 누가 발로 걷어차요. 보니까 그 악마 같은 소대장 놈 이예요. 아까 그 친구를 부르더니 업고 가라고 해서 숙소로 돌아왔지요. 이런 생활을 하다가 제1차 상병포로 교환 때 살아 돌아 왔지만, 이쪽에 와서도 6개월이나 병원신세를 졌고 지금도 북한수용소에서 얻은 골병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다시 박 백 중위의 증언.

<52년 1월에 우리가 안주에 있을 때 수용소가 어디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어요. 이래서「리어카」와 밥그릇을 부수며 수용소에 보내라고 15일 동안 투쟁을 했어요. 이러니까 내무성에서 나와 우리를 개별적으로 심사하더니 반쯤은 어디로 데리고 갑디다. 수용소로 갔다는 거예요.
이튿날 나머지 포로들도 집합시켜 떠나기에 우리도 수용소로 보내는 줄 알고 신바람이 나서 군가를 부르며 행군을 계속했어요. 그런데 3일만에 도착한곳이 일선에 가까운 양 덕이 예요. 또 방공호 파는 작업을 시키는데, 간혹 아군포성이 들려 미칠 것만 같더군요. 도망칠 생각뿐입디다. 이러는 동안 나는 늑막염과 폐「디스토마」에 걸려 박 천 32호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말이 병원이지 오막살이 민가가 모두 병실이고 약도 없어요. 간호원이란 것도 이남에서 끌려간 여고생들인데, 배급 나온 생리대천을 민간인한테 강냉이와 바꾸어 먹습디다. 나를 보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 찔끔 찔끔 우는 학생도 많았어요.

<표 대령 등 변절자들이 회유>
이 병원에서 국군포로로 편성된 노무부대 980부대 원을 몇 만났어요. 곽기덕 이란 자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980부대와 502부대에 있는 국군포로들에게 「테러」위협을 가해 2천 여명을 괴뢰군에 강제 입대시켰다는 거예요. 이들은 꼼짝없이 괴뢰군이 되어 휴전 후에도 송환되지 못했어요. 입원한지 한달 쯤 뒤에 82명의 포로환자를 골라 집합시키는데 대부분이 중고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이예요. 여기엔 신상철 씨와 고대재학의 한신석 씨도 끼여있고「리더」는 내가 됐어요. 마음이 서로 통해 단결도 잘 됩디다.
이번에 끌려간 곳은 평양 밑 중화 리에 있는 대남 공작요원양성소예요. 참 기가 찬 일이죠. 우리는 죽이든지 포로수용소로 보내든지 하라고 버티니까 양성소에서도 안 받겠다고 하더군요.
이때 머슴살이하다 군에 들어와 포로가 된 자 한 명만 굴복하고 나머지 81명은 마침내 바라던 포로수용소로 가게 됐습니다. 처음엔 강동군 연화 리 수용소에 갔다가 53년 초에는 만포 진으로 이동했어요. 여기서도 송호성·강태무·표무원 같은 배신자들이 와서 회유도하고 반미구국투쟁위원회에 가입하라는 등 성화를 부렸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트럭에 실려 판문점으로>
하루는 환자포로들만 골라서 만포 진 고개 너머의 마을에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국군장교포로들이 많이 있었고 대우도 좋습디다. 알고 보니 모든 포로에게 건물파괴나 요인 암살 같은 지령을 주고 서명을 하라는 거예요. 나는 못한다고 했더니『너는 못 보낸다』는 거예요. 나는 처음으로『보낸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한 3일 있으니까 대공표지판을 단 1백대의 소제「트럭」이 옵디다. 이제야 모두 돌아간다고 환성이 수용소에 메아리쳤어요. 이것이 소위 53년 4월18일의 상병포로 교환시초지요. 개성송도중학에 도착했는데 휴전회담 북괴대표 이 상조가 나타나서 수용소생활의 소감을 물어요.
나는 사실대로 좋지 않게 이야기했어요. 내일이면 모두 판문점으로 간다는데 그날 저녁에 나를 불러서 갔더니 그대로 개성내무서 감방에 집어넣는 거예요.
개성에 15일 있다가 평양으로 이송됐는데, 여기서 서해연평도「동키」부대에 있다가 포로가 된 미군중령을 만나 서투른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눴어요.
그랬더니 나를 간첩으로 몰아 약식재판에서 7년 징역을 선고합디다. 이 순간 대한민국만세를 크게 한번 부르고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이튿날「트럭」에 싣더니 자꾸 북으로 달려 만포 진 옆의 외 귀 수용소에 집어넣습디다.
8월초에 다시 끌어내서 기차에 실어 개성으로 내려봤어요.「트럭」에 실려 판문점으로 올 때 나는『국군의 의지는 못 꺾으리』라고, 손을 깨물어 혈서를 썼어요. 이걸 본 괴뢰경비병은 나를 밀치며 욕실을 퍼붓습디다. 8월6일에 나는 혼자 판문점서 미군「헬」기 편으로 문 산으로 와 마침 방한중인「덜레스」국무장관과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이로써 생과 사의 갈림길을 헤매던 나의 북한포로수용소생활은 끝난 거지요.>
주요일지(1950년 12월6, 7 ,8일)
※12월6일▲미 해병대, 장진 포서 적 포위망 돌파▲미 군기, 평양침입 적을 맹 폭▲「콜린즈」미 육군참모총장, 한국에서 원폭 사용 않는다고 언명▲중공살군 요구하는 6개국 결의안, 「유엔」정 위에 상정.
※12월7일▲미7사단, 혜산진 일대서 철수 ▲중공군, 곡 산에 집결 ▲38이남 전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서울시관하 초비상경계 ▲주중대사에 이범석씨 임명 ▲「유엔」정 위, 한국대표참석 가결(48대5).
※12월8일▲「유엔」군, 겸이 포∼중화∼수 안∼곡 산∼신 계에 새 방어진구축 ▲아군, 원산철수 완료 ▲이대통령, 미에 50만 한국장정 무장요구 ▲정부, 서울서 부녀자 철수 무방 발표▲고유 균 주미중국대사, 3만국부군 한국전에 사용하라고 언명 ▲「트루먼」-「애틀리」 회담 완, 한국서 임의 철수 않기로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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