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의 혈육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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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당대의 시성 두보는 전란 중에 살았다. 따라서 혈육의 별리의 슬픔을 누구보다도 더 뼈저리게 느낀 시인이었다. 「위촌삼수」에는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쟁영적운서 일각하평지…』로 시작하는 시 한수. 『서쪽에 험하게 솟아 오른 새빨간 구름사이 햇빛은 평야에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자문위에선 참새가 지저귀고…. 나는 이제 천리 길을 돌아온 것이다.
처자식들은 내가 살아 돌아와 있다는게 이상한 것이다. 놀라서, 또 놀라서 그 놀라움이 가라앉아 눈물을 닦는다.
난세를 나는 방랑해왔다. 살아 돌아오게 된 것은 전혀 우연이었다.
이웃사람들이 울타리 너머로 모여들고 그들도 감동해서 흐느끼고 있다. 밤이 깊어 또 초를 바꿔 켰다. 집사람과 마주앉아 있는게 꿈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드디어 20일 열리게 됐다. 잃었던 가족을 되찾을 수 있는 서광이 보이는 것도 같다.
남북으로 갈라져 살던 가족끼리 정말 20여년만에, 서로 안부를 나눌 수 있다면 그때의 감동은 얼마나 벅찰 것인지? 굳이 당시를 빌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란 너무 벅찬 감동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역시 시의 힘을 비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가족을 되찾는 기쁨에 젖은 1천만의 실향민들은 새삼 20여년전 38선을 넘었을 때의 단장의 장면을 어제 일처럼 되새길 것이다.
또 한 수는 『사교미령정 수노불득안…』으로 시작하는 「수노별」. 『늙은 아내가 길가에 엎드려 울고있다. 세모인데도 얇은 한겹 옷을 입고있다.
이게 생이별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걸 누가 알리. 춥겠거니 생각하니 더욱 그녀가 가련해진다.
여기를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는 못하겠지. 아내는 내게 제발 조석을 거르지 말라고 일러준다.』
이런 쓰라림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 한때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기에 더욱 이번 남북적십자대표회담을 반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이라면 강산도 두 번 바뀐다. 그 동안에 얼마나 많은 변천이 있었겠는지. 더러는 숙청되고, 더러는 광산에 갇히고, 더러는 또 월남한 남편·아들·딸 이름을 목메어 부르다 숨지고‥.
이런 사람들의 소식을 얼마나 제대로 알게될 수 있겠는지, 소식을 나누어 갖게 되기까지에는 얼마나 또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인지. 아직도 머나먼 길이 남과 북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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