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허풍과 신세한탄 느는 남편 때문에 지친다는 40대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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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5세 주부입니다. 3살 연상 남편의 허풍 때문에 고민입니다. 연애할 때 무슨 콩깍지가 씌었는지 ‘내가 책임지고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벌써 결혼 26년째입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오히려 전 늘어가는 남편의 허풍에 점점 더 짜증이 납니다. 맨날 ‘인생 한 방이지’라는 남편에게 ‘실속 좀 챙기고 살라’고 하면 버럭 화까지 냅니다. ‘나를 못 믿느냐’면서요. 당연히 못 믿지요. 허풍 듣는 것도 괴로운데 요즘은 술 먹고 와서 신세한탄까지하니 이 또한 듣기 괴롭습니다. 이게 혹시 남자의 갱년기인가요

A 허풍의 긍정적인 심리 효과는 자아 팽창(ego expansion)입니다. 풍선에 공기를 넣으면 부풀어오르듯 나에 대한 근사한 느낌이 늘어가는 거지요. 남자는 자신이 여전히 힘있고 강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를 근사하게 느낍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정도의 허풍은 남자에겐 필수품인 셈이지요.

 자주 가는 유서 깊은 냉면집에 가면 머리 하얀 남자들이 수육에 막걸리 한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일부러 엿들으려 하는 건 아닌데 직업병인지 각 테이블에서 하는 얘기 내용이 귀에 다 들어 옵니다. 제일 많이 들리는 단어는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가들 이름입니다. 다들 지금 권력자들과 친분이 두텁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대통령을 가르치고 키웠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왕년에 끝내줬다’는 대화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 냉면집만 가면 숨은 진짜 권력자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셈입니다.

 술안주로 삼는 이런 달콤한 허풍은 허전하고 허무한 인생에 잠깐이나마 기분을 좋게 해주는, 즉 자아팽창감을 느끼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게 지나치면 사기나 정신의학적으로는 병적 망상이 될 수 있겠지만요.

 한번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정서적 문제를 안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에게 힘든 마음을 털어놔야 할 텐데 엉뚱하게 ‘돈 벌고 싶지 않느냐’ 묻습니다. 응급 구급차 50대를 수입하면 자기가 다 팔아 큰 수익을 내주겠노라 얘기합니다. 웃으며 잘 들어주니 허풍이 더 세집니다. 구급차 말고 응급 헬기를 수입하자고요.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처방약 용량을 늘렸습니다.

 사연 주신 분은 남편 허풍에 지쳤다지만 이렇게 남자의 허풍엔 분명히 순기능이 있습니다. 남자의 허풍이 없다면 세상이 너무 건조하지 않을까요. 남편 허풍 때문에 짜증 나는 아내도 있지만 거꾸로 허풍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답답한 남편에게 숨 막혀 하는 아내도 적지 않습니다. 과장 없는 철저함이 지나치면 강박이 되기도 합니다. 강박은 불안 증상이고, 이렇게 불안하면 현재의 행복이 잘 느껴지지 않지요.

 적당한 허풍은 남자에겐 삶의 긍정성을 증폭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신세한탄이 곁들여진 허풍은 아내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지난주 남자의 두 번째 사춘기에 대해 말씀드렸죠. 사춘기, 즉 정체성의 위기가 온 것이라고요.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거죠. 게다가 내 사회경제적 가치는 상승하다 주춤하는 커브를 그리고 흰머리는 늘어가니 신체의 힘도 전만 못합니다. 자아팽창감이 풍선 바람 빠지듯 쪼그라듭니다.

 병원 민원 담당 부서에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며 민원을 강하게 제기하는 50, 60대 남자가 적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인데도 분노의 정도는 자신의 정체성에 큰 타격을 받았을 때 나오는 수준입니다. 자아팽창감이 단단히 고정된, 즉 자존감 강한 사람은 사소한 자극에 분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다 빠진 자아팽창감은 사소한 자극을 견딜 힘도 없습니다.

 사연 주신 분 남편의 허풍과 화, 그리고 신세한탄은 바로 이런 쪼그라든 정체성에 대한 심리 반응인 셈입니다. 그런데 화 잘 내는 허풍쟁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외롭고 주변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기회도 줄어듭니다. 그러면 정체성의 자아팽창감은 더욱 쪼그라들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남자의 두 번째 사춘기에는 어떤 전략이 유용할까요. 가장 중요한 게 역할 변화(role change)에 대한 유연한 수용입니다. 뛰어난 구질과 체력으로 제1선발투수를 담당하던 선수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체력은 줄었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결판을 내는 마무리 투수로 역할을 바꿔야 합니다. 선발과 마무리를 연결하는 중간계투를 담당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중간계투, 야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입니다. 기억하는 관중은 별로 없지만 그렇게 변한 역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당사자는 강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할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는 게 두 번째 사춘기의 중요한 심리 발달 과제입니다. 최고(最高)에서 최선(最善)으로 가치관 튜닝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치열하고 열심히 산 남자일수록 두 번째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통을 크게 앓기 쉽습니다. 평생을 상승 전략만으로 살았기 때문이죠.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기업 인재개발원에 가보면 벽 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상승 전략이죠. 평균 수명이 60세라면 이 같은 상승전략만으로 달려가는 것도 효율적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백 세를 사는 게 남의 일이 아닌 세상입니다. 상승 전략만으론 한계가 있습니다.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부드럽고 안락하게 착륙할 것인가 하는 하강 전략이 중요합니다. 하강 전략은 다시 말해 역할 변화에 대한 수용성을 기르는 거죠. 이를 위해 좋은 방법이 자연과 문화를 즐기는 겁니다. 취미일 수도 있죠. 취미의 사전적 정의 중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취미를 ‘기른다’고 표현합니다. 취미는 또 다른 힘인 셈이죠. 시간과 돈만 있다고 갑자기 ‘취미력’이 생기진 않습니다.

 자연과 문화 즐기기에 몰입하면 상처 받은 내 자존감을 힐링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개인적 시각에서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연과 문화에 담겨있는 철학적 메시지, 즉 삶의 상승과 하강, 그 굴곡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느끼면 ‘이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 그리고 인류의 문제’라는 여유로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바뀐 내 위치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수용하는 힘이 생깁니다. 약해지는 게 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라고 삶의 해석이 바뀌는 겁니다. 그러면 허풍도 신세한탄도 줄어듭니다.

 곧 단풍이 지겠네요. 남편과 함께 낙엽을 밟아보는 여행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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