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9)-제자는 필자|제15화 자동차 반세기(3)-송용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자동차 운수업>
자동차도입이 늦은데 비해 우리 나라의 운수사업, 즉 자동차여객운송사업은 무척 빨리 기틀이 잡힌 것으로 알고 있다. 내 기억으로는 황실에서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한 이듬해부터 운수사업에 눈뜬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보다 최승렬씨가 더 잘 아는 것으로 최씨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일본의 대정 원년이니까 1912년인 모양이다. 그해 봄 당시의 총독부 경무총감부 보안과장을 면회온 24세쯤 된 홍안청년이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보안과장을 찾아오다시피 했고, 무엇인가 담판을 지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때의 보안과장은 나중에 전북지사와 동진수리조합장을 지낸 해각중장이었고, 청년은 나중에 함경북도 자동차업계의 제1인자가 된 일본인 근등삼천삼이었다.
청년사무관과 약관의 실업가가 만난 셈이고 혈기가 맞아 퍽 친하게 되었는데, 그때 근등이 담판을 짓고자 한 것이 바로 조선 안의 자동차영업노선허가 문제였다.
그의 주장은 철도망이 좁은 조선의 산업개발을 위해선 자동차 교통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해각보안과장도 그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게끔 되었다.
그러나 근등이 신청한 자동차영업노선의 허가를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해각은 막상 구체화 단계에서 망설였고, 그만큼 근등의 계획은 그 당시로는 꿈에도 생각 못할 기도였다.
뜻 있는 사람의 규합에 나선 근등은 경성서 시계 장사를 하여 돈을 번 일본인 직거가일, 조선갑부 이봉래씨 등 3명을 끌어들이기에 성공했다.
직거가 10만원, 이씨가 5만원, 근등 자신 등 다른 2명이 5만원 등 모두 20만원을 출자하여 자본금으로 삼아 차를 도입키로 결정하여 곧 일본에 있는 「아메리카」상회와 「포드」차의 일수취인특약을 맺었다.
그때 특약을 할때는 현금을 적립하든지, 은행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당시 최대의 은행인 제일은행에서 보증을 서주는 등 준비작업도 순조로왔다.
근등은 드디어 진남포∼광양만·사리원∼해주·천안∼온양·충주∼조치원∼공주·삼간포∼진주·신의주∼의주 사이 등 6개 노선의 노선영업허가원을 냈다.
그런데 막상 차를 운전할 운전사를 구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당시 조선 땅에는 운전사가 2, 3명 정도뿐이었고 일본에서조차 20명 안팎일 때라 운전사 양성이 시급했다.
경성에 운전사양성소를 차리고 사람을 모집했으나 처음 한동안은 지원자가 없어 골탕을 먹은 끝에 월급을 주고 월급 외에 보너스를 더 주기로 하여 간신히 10여명을 끌어 모았다.
그래서 배출된 제1기 운전사가 마산의 염고, 수원의 토거, 진주의 궁지, 인천의 별부, 총독부의 중도 등 일본인이었고 차차 지원자가 많아져 경성 낙산 쪽에 살던 부자 이용문도 운전사양성소에 입소했었다. 그때 첫 운전사들은 전부가 일본인들이었다.
그때는 총독부에조차 「자동차 취체규칙」같은 것이 없어 미국 것을 번역해서 운전사교육에 사용했고 교과서도 미국 책을 그대로 베껴 사용했다.
회사이름도 투자를 가장 많이 한 직거 이름을 따서 직거 자동차상회로 정하는 등 만반준비를 갖춘 채 허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나올 것 같았던 허가가 나오지 않은 채 하루 이를 지날수록 경비지출은 심해지는 등 근등과 해각의 심경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이 된 어느 날 해각보안과장은 새하얗게 질려 근등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총독이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사내총독의 반대이유가 걸작이었다. 『조선사람은 새것이라면 사죽을 못쓴다. 보라구, 가재를 말아 금시계를 산다, 전답을 팔아 자전거를 사는 등 몹쓸 짓들만 하는데 그래 자동차를 들여오면 오죽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같지 않은 소리를 전해들은 근등의 탄식은 말할 수 없었다. 담판을 짓겠다고 사내를 만났지만 같은 소리였다. 『아! 그래 생각해 보라구. 자동차를 들여와서 영업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하면 조선사람들은 차만 타러 들고 걸어다니러 들지 않을 것은 물론 나중에는 일조차 안 하러 들 것 아니냐』하는 것으로 자동차 영업은 시기상조라고 끝내 고집이었다.
그것으로 근등의 꿈은 깨어져버리고 비애마저 느낀 그는 경성에서 평양으로 주거를 옮기고 말았다. 울적한 그가 경성서 가지고 간 「포드」형 승용차로 대동강변을 드라이브했는데 평양에는 그때 차가 처음 들어간 것이었고 2년 가까이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근등은 진남 포부윤 중야를 알게 되고 근등의 심정을 알아준 중야는 광양만 염전을 경영하던 일본인 내전을 설득, 내전의 염전공사용 자동차 명목으로 차를 들여와 일반인을 태우면 되겠다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중야·근등·내전 등이 합의를 봤다.
그러나 일반인을 태워도 요금을 받을 수가 없으니 편승의 사례금으로 운임을 받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예컨대 10리에 20전씩으로 정액 팁을 받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변칙적인 승합 (노리아이)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승합 자동차의 시초를 이룬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해각보안과장이 후일 전북지사로 왔을 때 최승렬씨에게 들려 준 것이라고 들었다. <계속> 【문책 백학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