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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제자는 필자|제15화 자동차 반세기(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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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나라에 자동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인력거만 타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때만도 우리 나라의 대중교통수단은 우마를 이용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고, 경성(서울)에선 전차와 인력거·마차와 자전거 등이 이용됐지만 그것마저 초기에는 지주·일본사람·황족 등 고관대작들의 전유물이었다.
인력거의 경우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종32년이라니까 1895년인 셈이고, 그것이 광무원년 즉 1897년에 좀더 퍼져 만자(인력거꾼)가 30인이었으며 자동차가 들어올 무렵엔 인력거꾼이 1백58명이었다는 이야기를 내가 「요꼬하마」자동차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했을 때 우연히 알게된 총독부 관리한테서 들은 생각이 난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재명 의사한데 칼맞았을 때 인력거꾼과 그의 부인 박원문이 죽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그때가 순종 강희3년 즉 1909년이라니 당시 최고의 교동수단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무렵의 고관대작들은 평교자나 초헌을 타기보다는 신식인 인력거를 타고 으시댔을 터이니, 자동차가 들어왔을 때는 어떤 심정들이었는지 참 궁금해지기도 한다.
경성의 전차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들어서 알기로는 민비가 시해 당한지 4년째인 광무3년 음력 4월 초파일에 서대문∼동대문사이를 잇는 전차노선이 개통됐는데, 그 전차를 고종이 맨 처음 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899년인 셈이다. 그날은 고종 등 황족은 물론 국내 고관·각국 공사·영사들이 참석하여 장안은 축제분위기였는데 고종은 그날 명성황후 능이 있는 홍릉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지금도 전주에 생존해 계신 일제시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운수업자 최승렬씨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경성고보에 유학한 최씨는 물론 그 몇해 후겠지만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5전을 주고 전차를 탔다면서 황실전용 귀빈차 1대등 모두 8대로 전차운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차를 들여오게 된 동기도 고종이 명성황후 능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자주 봉련을 옮기는 것을 본 미국인 「콜브런」과 「보스트윅」이 전차의 편리함을 상주하여 윤허를 받고, 한미합자로 전차 노선을 장만한 것이라고 들었다.
여기에 비하면 자전거는 1911년께 11명이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니 자동차보다는 약간 빨리 도입된 것이거나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 같다. 이 자전거를 맨 처음 탄 사람은 서재필씨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지만 내가 알기론 1908년에 의친왕 이강공이 처음 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뭏든 이런 탈것을 가장 많이 애용하고 항상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의친왕과 윤덕영씨 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특히 의친왕은 자전거뿐만 아니라 이등박문이 첫선을 보인 마차도 황족 중에선 가장 먼저 탔고, 자동차도 예외 없이 먼저 탄 사람 중에 끼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차의 경우, 쇠바퀴가 두개 달린 것을 말 한필이 끌도록 만들어진 것이 처음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창덕궁 대조전 앞뜰에 전시중인데, 그때 마차 족으로는 박영효·이완용·윤택형·이하형·윤덕형으로, 그들을 한때 마차 족으로 불렀다는 우스개 소리로 들었다. 이들 마차족 가운데는 누구보다 먼저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윤치오씨가 가장 멋쟁이로, 부인의 성마저 윤씨로 고쳐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다는 이야기는 나이 좀 든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그런 때의 자동차 출현이니 그 경이스런 것은 일반사람보다 그래도 내로라 하던 마차 족과 인력거족들에겐 특히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게고, 역시 이들이 자동차는 맨 먼저 구입한사람들이 된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당시 최초의 멋장이요 당대 일류의 한량으로 알려진 이강공의 행적은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그는 자기차인 그때의 최고급차 중의 하나인 「오버·랜드」를 한시도 쉴틈없이 타고 다니며 차창 밖으로 목을 길게 내밀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쳐다보기 일쑤였고, 조금이라도 예쁘다 싶을 땐 차를 서행토록 하여 그야말로 인물감상을 했다는 것은 널리 퍼진 이야기다.
그때 이강공의 차를 운전한 사람은 처음에 마차를 몰던 윤권씨로, 윤씨는 마부노릇을 하다 어떻게 이태리 영사관에 고용원으로 들어가 운전기술을 배운 것으로 알고있다.
그 당시만 해도 황족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고, 또 일단 취직만 하면 고등관 임명장을 받고 모자. 옷 등 온몸에 금테를 두르다시피 하여 퍽 인기가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초기에는 이왕직 소속의 황족 차를 운전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일본 사람들로, 아예 조선사람은 채용하는 것을 꺼렸고, 그 풍조는 해방될 때까지 계속됐다. 『고등관이 되려면 운전사가 되라』는 말도 그때부터 유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같이 자동차가 도입된 초기에는 극소수의 특수층 전유물이던 것이 해가 지나면서 일반부호들도 자동차를 가지기 시작하여 광업을 하던 박기효씨·자주 배석환씨·친일파 거두 한상용씨·갑부 김종성씨·백명권씨 등이 차를 구입했고 김년말·최창학씨 등이 그후에 「비크」를 탄 것으로 안다. <계속> 【서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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