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과학과의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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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는 본질적으로 비평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시가 외부로부터 압도되는 비평을 견디지 못하고 괴멸한다. 시에 있어서의 불멸성이란 특정한 시비평의 편견이나 분석에 의존하지 않고 시 자체가 비평적 가세에 자승함으로써 시의 원형에 자유의 계기를 부여할 때 가능하다. 이 말은 시는 곧 비평이다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것은 먼저 언어의 과학적인 용법에 의한 지시의 확실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시의 부패를 막고 감동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를 우수한 시와 조악한 시를 무서명으로 병치하는 것을 그의 사명이라고 말한 「리처즈」는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일련의 태도가 그 나름대로 적당한 체제화를 가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급의 시가 비평과 상관없을 때에도 최단시일 안에 매몰되는 것은 일단 언어의 지시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확인이 시인들을 반성케 한다. 「로이·퓰러」의 『시와 과학의 화해』(월간중앙)는 그런 점에서 한국시단에도 깊이 관련된다. 그는 「셸리」의 『서풍부』를 통해서 언어적 「이벤트」를 면밀하게 파악한다. 그는 언어가 환정적인 역할만으로 사용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시에 있어서의 과학성, 감동을 위한 과학적 분석을 가함으로써 시의 완벽성을 시도한다. 그는 이런 노력을 <과학에 대한 맹목적 혹은 중립적 태도는 시인을 그의 시대의 정신으로부터 유리시켜서「리얼리티」에 이해를 좁히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감상주의와 같은 파괴적 특색을 갖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런 태도는 「곡트」가 말한 <시는 과학이다>라는 경구와 만나고 있다.
한국시가 더 기대되는 대상이 되려면 일종의 창조적 절망감으로부터 이러한 과학성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자각을 전제로 하지 않고 언어와 언어사이에 연관성을 포기한 상태로 나열하는 행위, 언어에 의해서 우연히 지시된 사물이 어떤 종류의 타아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않는 비력, 필연적인 동기를 만들기 전에 혼란을 일으키는 오문, 의진술에 있어서의 감점이입의 남용 따위로 시를 불명료하게 만든 오랫동안의 통폐를 지양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체시 이래의 명시들을 분석할 때 그것들의 대부분이 얼마나 많은 몽매함을 드러내는가를 알 수 있는 비평이 필요하다. 가령 청록파의 과오는 그런 비평을 감수하는 약체로서 대표되는 예에 속한다. 한국시가 맞고있는 시련은 이제까지의 시련보다 더 가혹하다는 것을 언어가 과학과 만날 때 일어나는 반응을 통해서 절감한다.
김광섭의 『달』(시문학)은 그의 정신적 허탈 또는 해탈이 동시적인 규모로 이루어졌다. 고색 창연한 시조정서에 의한 수사법이 그의 말기의 특기로 말해지는 기술의 무중력감을 표표하게 노출한다.
따라서, 극도로 육감을 배제한 눌어가 기묘한 쾌감과 호소력을 동반하면서 영시어조에 이른다. <동창에 달이 드니 봄 벌레들 인생 낙엽을 들고 일어나 달을 따라간다.>에서도 <인생 낙엽>은 눌어임에 틀림없고 그것은 끝의<달은 노래 아마도 태백일쎄.>의 오문까지 눌어로 포섭하기에 알맞다.
이 시에 나오는 월인 「암스트롱」「셰퍼드」와 시적인 월인 태백이 위화되지 않고 함께 화석화되고 있는 점이 시인의 모형을 만들어준다. 김현승의 『그림자』(월간문학)는 일종의 의식구조의 경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시가 자주 사고의 잔해감으로 나타날 때 그의 주재료인 청년적인 서정과 긴장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의도하고 있는 표현형식에 반란이 일어난다.
이 시에 나타난 결함은 사물과 내면사이의 단일성 때문에 시의 주제를 관념을 위한 가학적인 집착으로만 응고시킬 때 솔직하게 나타난다. 그의 언어는 그러므로 골재로 머무를 때가 많다.
신동집의 『산수도』(시문학)는 한 폭의 남화 앞에서의 심경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문득 동양의 산수도와 만났다는 사실, 그의 구문의 불투명한 개입으로 인한 역효과와는 달리 평명한 설명을 가하면서 <압도적인 산수><죽어서나 들어볼 개울물소리>따위의 극치를 옹호하면서 인간이 한 풍경화 속의 무시간과 일치하는 놀라움을 제시한다.
박용래의 『양귀비』『창포』(시문학)는 그의 꾸준한 풍경단장이 좀더 신랄한 어법을 얻음으로써 압축되어있다. 『창포』의 경우 <문살의무기강><열무김치><오디빛><꽃창포>의 결구명사들이 주는 인상은 그의 「이미지」가 악질적인 확신을 공급하고 있음을 뜻한다.
최하림의 『웃음소리』(월간문학)는 현실에 대한 혐오, 부정을 해양적인 분위기에 환치시킴으로써 그것들이 방황하는 과정을 비정한 「터치」로 부각시킨다. 그의 언어는 이성부보다 더 살벌한 반응을 전제하는 반면 지적인 배타주의에 입각한다. 그러나 그의 질감은 일단 그에게 강요되고 있는 투계와 같은 문제의식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강은교의 『나의 평화주의』(월간문학)는 이 달의 가장 바람직한 수확이다. 좀더 혈연적으로 천착한다면 그가 벌써 이런 시를 쓰고 어떻게 시를 지속할 것인가를 우려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2연의 <죽은 장미뿌리>를 <죽은 나무뿌리>로 일반화시켰다면 그것은 <키 큰 나무><강물>따위와 불화를 이루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지적한 뒤 한편의 명시를 만났다는 실감이 따른다. 그는 불과 물을 현실(욕망)과 이상(희망)으로 표상하면서 신비스러운 평화를 예감한다.
서정주와 방불한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따위의 폭넓은 격조와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을 쓰다듬고 있나니.><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따위는 절창이다. 다만 시의 제목이 시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김여정의 『봄들판』(현대문학)이 가지고 있는 전율의 눈도 여류시를 극도로 부정하는 나의 관습을 찢어주고 있다. 그의 냉혹무비한 자연체험은 이제까지의 재래식 관조와 전혀 다른 악마적인 생명감을 유로시킨다. 그것은 서예다.
서예는 언어 자체가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의 서예야말로 시를 암시한다. 김여정은 중요한 시민이 될 수 있다.
신석초의 『비화시첩』, 김춘수의 『속목련』, 김종길의 『오디』, 박재삼의 『무제』, 김영태의 『시I Ⅶ』, 김준태의 『들쥐』를 언급하지 못한 일이 안타깝다. [고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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