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함과 고소함 단단함과 물렁함 묘하게 합쳐졌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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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호 22면

1 샛노란 속살에 고소함과 달콤함이 함께 숨어 있다.

이젠 남쪽도 완연한 가을이다. 이런저런 새로운 먹을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시장에 나오는 계절이다. 물론 통영이야 ‘바다의 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곳이니 바다에서 나는 것들이 가장 많지만, 경작할 곳이 그리 넓지 않은 땅에서도 가을이 되면 적어도 반 년 이상을 자라온 무언가가 열매를 맺는다. 특히 삼덕항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욕지도의 고구마는 가을 통영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다.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4> 욕지도 고구마

통영에는 섬이 많다. 전남 신안군이 1004개로 가장 많은 섬을 갖고 있는 지자체인데(1004개라는 숫자가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통영만 해도 매년 새로운 섬이 추가되고 있는데 신안군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아마도 ‘1004’라는 숫자를 버리기엔 그 매력이 너무 클 것이다), 통영이 바로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여의도 면적의 1.5배인 욕지도는 300개 내외의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다. 그러니 무언가 경작하는 게 있을 거라 상상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넓은 섬도 심고 키울 땅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돌을 골라낸 후 그곳을 평평하게 다지고 물을 채워 넣어야 하는 논은 이런 이유로 욕지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욕지 처녀 시집 갈 때까지 쌀 서 말도 못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이 섬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지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명이 넘는 주민이 살고 있는 것은 욕지도가 어업 전진기지이기 때문인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바다에서 나는 것만 먹고는 살 수 없는 노릇. 그래서 키우기 시작한 게 고구마였다. 그 고구마를 키우는 곳을 보러, 그리고 제철 고구마를 사러 배를 탔다.

2 고구마를 선별하고 있는 밭주인 아저씨 3 단 두 개만으로도 냄비를 가득 채우는 욕지고구마 4 말린 고구마와 각종 잡곡을 넣고 끓인 빼떼기죽

검푸른 파도 보면서 캐는 고구마
차를 싣고 배에 올라 한 시간 남짓. 배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쪽으로 길을 잡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면 오직 섬에서만 볼 수 있는 검푸른 바다가 내내 함께 달리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비현실적일 만큼 깊은 푸른색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문득문득 벌겋게 드러난 황토가 바다의 붉은 반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땅을 파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차를 멈추고 내려 물어본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여는 태풍이 오는 길목에서 반대쪽에 있는 기라 날씨 영향은 벨로 안 받으니까.”

이제 막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흙을 툭툭 털어내며 도로 쪽으로 걸어 나오던 밭주인 아저씨는 작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줬다.

“요즘에는 워낙 이런저런 고구마들이 마이 나오잖아요. 호박고구마도 나오고 자색고구마도 나오고. 글타고 해서 욕지도에서 자라는 고구마 품종이 딱히 다른 건 아니에요. 그냥 옛날부터 있던 고구마를 기르는 건데, 여기 환경이 다른 데랑 다르다 보니까 맛도 달라지는 거지요.”

그 환경이라는 건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돌이 많이 섞인 흙, 거의 다 비탈로 이루어진 경작지 등을 말한다. 다시 말해 고구마 말고는 키울 것이 거의 없는 곳이라는 뜻. 당연히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재배하는 것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예전보다 교통이 훨씬 편리해졌고, 그래서 이제는 먹을 것을 공수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어졌지만 욕지도에서는 여전히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다. 이제는 구황작물이 아니라 통영을 대표하는 특산작물로 지위가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맛이 배부름 때문에 잊혀질 만큼 단순한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통 고구마는 물기가 많이 포함되어 물렁한 것(물고구마와 호박고구마)과 퍽퍽하고 살이 단단한 것(밤고구마와 자색고구마)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단맛이 강하고 후자는 고소한 맛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욕지 고구마는 그 두 가지 특징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맛이다. 단단하지만 지나치게 퍽퍽하지도 않고 단맛이 나지만 고소함 역시 잃지 않는 독특함이 바로 욕지 고구마의 특징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러니까 쌀이 귀하던 시절에는 이 고구마를 이용해 죽을 끓여 먹었단다. 욕지도뿐 아니라 통영 전체에 쌀이 모자라던 때의 이야기다.

빼떼기죽, 단단한 삶의 의지 반영
“이기요? 글쎄요. 지금 어른들의 어른들 때부터 먹은 걸로만 알고 있지 언제부터 묵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빼떼기죽을 언제부터 먹었느냐는 질문에 죽을 포장해 주던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튼 오래됐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저도 어렸을 때 먹었던 기억이 있고 저희 어머니도 어렸을 때부터 드셨다고 하니까네.”

빼떼기. 삶은 고구마나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것을 뜻한다. 그러니 빼떼기죽이란 그것을 이용해 끓인 죽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일반적인 죽과는 다르다. 보통은 주재료 한 가지만을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이는 반면 빼떼기죽은 말린 고구마와 팥·강낭콩·조·찹쌀까지 넣고 2시간 이상 푹 끓인다고 한다. 재료의 면면만 봐도 쉽게 소화되지 않는, 다시 말해 오랫동안 공복감을 잊을 수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가을이 지나모 묵을 게 없었다 아입니까. 이 통영이.”

식재료를 건조하는 것은 오래 보관하기 위함이니 빼떼기 역시 그나마 먹을 게 많던 가을을 보낸 후에야 죽을 쑤어 먹었을 게 틀림없다. 거기에 이러저러한 잡곡들을 섞어 배속을 통과하는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켰던 것 역시 그만큼 배고픔의 시간이 길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아기 키우느라 정신없는 아침을 보내고 공복으로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 빼떼기죽을 사서 돌아오는 길. 통영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거친 섬의 거친 땅에서 자란 고구마. 그리고 거친 잡곡들을 섞어 끓인 빼떼기죽을 먹으며 다시 가을이 오길 기다리며 바다로 나갔을 사람들의 뒷모습은 또 얼마나 거칠었을까.

나중에, 지금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아기가 보기와는 전혀 다른 이 달콤한 죽을 먹게 될 때쯤엔 그저 민담 같은, 그래서 그렇게 배를 곯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게 되겠지만 말이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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