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때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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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최근에 일본에서는 한국어가 유행 중에 있는 모양이다.
지난 3월에 일본에서 출판된 『알기 쉬운 한국어』가 학생·회사원·주부들 사이에 많이 팔리고 있다 한다.
한국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잘 팔렸다해도 고작이 3천부 정도.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말이 묘한데서 묘한 뜻으로 더 잘 팔리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 백화점의 상품들을 상습적으로 슬쩍 훔쳐 내오던 왈가닥 여고생 「클럽」이 동경의 한 경찰서에 의해 적발되었다. 취조한 결과 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은어 가운데는 한국말이 20여개 어나 된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그 중에는 『일본 사람』·『경찰』·『미안합니다』같은 정확한 한국말도 있었지만, 『붓 때린다』라는 묘한 신조어도 있었다. 「붓도바스」(때려서 날려 버린다)란 일어와 『때린다』라는 우리말이 합쳐진 것이다.
물론 취조받은 여고생들 중엔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고, 모두가 일본의 중류 가정 출신이었다. 『한국말을 쓰면 타교생들의 기가 꺾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한다. 7월1일자 일본 A신문의 기사였다.
유행어란 그때 그때의 집단적인 의식이나 성향을 반영한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한 사회 집단의 유행어, 또는 은어는 그 집단의 생활 의식의 한 표현이 된다. 좀 더 크게는 한 집단안에서 통용하는 은어는 그 집단이 속하고 있는 사회 전체의 병리 현상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의 불량 여고생들 사이에 한국말이 은어로 유행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반가운 일은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한국말은 비행소년들 사이에서 상용돼 왔었다 한다. 그 까닭을 일본의 경시청에서는 비행 집단과 관련된 한국인 자녀들로부터 구전된 게 아닌가 보고 있다.
그 정도의 이유 만이라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만일에 폭력이나 범죄와 한국인 전부를 결부시키려는 이지러진 연상 심리에서 비행 집단 사이에 한국말이 유행된다고 본다면 그처럼 딱한 일은 없다.
딱해지는 까닭은 또 있다.
말이란 뜻만이 아니라 「이미지」까지도 전달한다. 심리학적으로는 사고의 결과가 말로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 말은 또 무의식중에 사고 자체까지도 한정시키고 영향을 주곤 한다.
한 주먹의 비행 소년 소녀들의 은어가 어느 사이엔가 온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서 한국인과 범죄와를 접근시킨다고 본다면 이건 결국 보통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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