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코리아' 경고등 켜졌지만 "아직 판단하긴 이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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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셀 코리아(Sell Korea)'에 나선 게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한국 증시의 투자 매력이 떨어져 본격적으로 주식을 팔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1998년 주식시장이 완전 개방된 이후 지난 1월 말 현재 국내증시에서 외국인들의 투자비중(시가총액 기준)은 36.3%에 달한다. 액수로는 88조원에 이른다.

97년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 외국인의 투자비중은 불과 14%수준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발을 뺄 경우 증시는 물론이고 경제 전반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경고등은 켜졌다=외국인들은 지난달 6천4백60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지난해 외국인들이 월간 기준으로 1조원어치가 넘는 주식을 순매도(3.4.8월)한 데 비하면 규모 자체가 크지는 않다.

당시 시장에서는 세계 경기 둔화와 미국 뉴욕 증시의 침체 등으로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의 비중을 줄이는 것으로 봤다.

특히 외국인들은 세계 증시의 침체에 따라 자국내 펀드 가입자들의 환매 압력에 대비해 그동안 시세차익이 발생한 한국 시장에서 주식을 판 것으로 분석됐다. 그후 뉴욕 증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외국인들은 지난해 10월 순매수로 돌아섰고 올 1월까지 이런 기조가 이어졌다.

최근 외국인 매매에 대한 우려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기업수익.경기둔화 전망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순매수 기조가 5개월 만에 바뀌었다는 분석에서 나온다. 여기에 한국 증시가 안고 있는 특수한 악재도 한몫하고 있다. 해법을 찾지 못하는 북한 핵 문제와 노무현 정부의 출범으로 정책적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상업은행 뱅크원이 한국에 대한 주식투자를 단기간에 크게 줄인 것도 경제의 기초여건이 나빠지는데도 정책의 청사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네덜란드계 ABN암로 증권은 3일 보고서에서 "북핵 문제의 장기화와 신정부의 재벌수사로 드러난 한국기업의 구조적 문제점 등이 한국증시의 악재"라고 밝혔다.

◇본격적인 '셀 코리아'는 성급=일부 증권전문가들은 미국의 일부 대형 펀드들이 한국 주식의 비중을 줄이고 북핵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이지만 아직 '셀 코리아'로 보기는 성급하다고 지적했다.

메릴린치의 이원기 전무는 "냉정한 펀드매니저들은 비경제적 논리로 주식을 매매하지 않는다"며 "이라크전의 경우 고유가가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북핵 문제는 철저하게 심리적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북핵 변수는 증시의 외생변수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샐러먼스미스바니(SSB)증권의 대니얼 류 이사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선언이나 '불바다' 발언 등이 있었지만 오히려 증시는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셀 코리아' 발언이 나오는 이유로 단기 투기성 자금을 운용하는 헤지펀드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봤다.

대우증권 김평진 연구원은 "본격적인 '셀 코리아'는 없다는 게 전반적 시각이지만 뚜렷한 외국인 매수 업종이 없는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BNP파리바페레그린 이승국 사장은 외국인들이 1분기엔 기업실적 전망 등을 지켜본다는 생각이며, 그때까지는 그동안 오른 종목을 팔고 내린 종목을 사서 시세차익을 얻는 단기매매에 주력할 가능성이 많다고 전했다. 실제로 외국인들은 최근 삼성전자를 포함한 정보기술(IT) 관련주를 대거 처분하는 반면, 소재.철강.화학 등 최근 제품가격 상승으로 세계적으로 주가가 오르는 종목은 매수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외국인 순매도에 대해 모든 주식을 팔고 한국시장을 떠나는 '셀 코리아'가 아니라 '종목 교체'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이 때문이다.

장기 매매 패턴을 보면 외국인들은 지난해 초 이후 제일모직.기아차 등 수익성이 좋아진 회사에 대한 지분은 꾸준히 늘리면서, IT 주에 대해선 D램 값이나 미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 등 주요 변수의 움직임에 따라 매수.매도를 번갈아가며 탄력적으로 지분을 조절했다.

한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한국증시의 폭락을 노리는 헤지펀드가 '셀 코리아'풍문의 진원지일 가능성이 있다"며 "'셀 코리아'현상이 가시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같은 우려가 시장을 지배하면 실제 '셀 코리아'를 부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준술.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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