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 도미노'에 놀란 러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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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달 초 모스크바 시내의 한 호텔에 내로라 하는 러시아 록가수 1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 젊은 층의 폭발적 인기를 끌고있는 록 그룹 '아크바리움' '레닌그라드' '젬피라' '스플린' 등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이었다. 호텔 직원과 손님들은 느닷없는 스타들의 출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날 록가수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행정실 부실장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가 마련한 비밀모임에 참석한 것이었다. 음악이 아닌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수르코프는 참석자들에게 "러시아에 시민혁명과 같은 위기상황이 닥칠 경우 가수들이 젊은이 선동에 나서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가수활동에서 힘든 문제가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러시아 언론은 이날 모임에 대해 "지난해 우크라이나 시민혁명에서 반정부 성향의 록가수들이 야외공연을 열어 젊은이들을 대거 시위에 나서게 한 선례가 있어 크렘린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크렘린이 러시아 청년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록가수 단속에 나섰다는 것. 언론은 또 "수르코프가 나선 또 다른 목적은 2008년 예정된 대통령선거에서 젊은 표를 붙잡기 위해 미리 공을 들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백만 명의 팬을 몰고 다니는 록스타들의 노래와 말은 그대로 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초청받은 스타들 중엔 반정부 성향의 노래를 불러 크렘린을 불안케 한 가수도 있었다. 그룹 레닌그라드는 정부의 민간 석유기업 유코스 탄압을 빗댄 '자유'라는 노래를 불렀다. 아크바리움은 체첸 전쟁을 풍자한 '200번 화물(군인의 시신)이 돈이 된다'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함께가는' '우리들' 등의 친정부 청년조직 결성을 지원하는 등 젊은층 붙잡기에 안간힘을 써온 크렘린으로선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선 "옛 소련권 국가들의 연이은 민주혁명에 놀란 크렘린이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사회학자 알렉산드르 타라소프는 "러시아의 청년들은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과 달리 반정부적 성향이 높지 않다"고 말한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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