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로 본 월남전 내막|비록에 나타난 진상과 미 정부발표의 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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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근착「헤럴드·트리뷴」지는 「뉴요크·타임스」지의 국방성기밀문서 보도와 관련, 그간 행정부가 의회와 국민들을 얼마나 기만해 왔는가를 구체적 실례를 들어 폭로했다. 다음은 사건중심으로 본 행정부의 대 국민발표내용과 같은 기간에 이루어진 행정부의 「속셈」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월맹침공 1차 계획>
「존슨」대통령은 64년 6월 2일의 기자회견에서 행정부가 월남전을 월맹으로 확대하려는 준비작업을 하고있다는데 그러한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그러한 계획에 대해 전혀 아는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64년 3월 17일의 『국가안보조치각서 2백 88항을 보면, 월맹에 대한 보복조치로 72시간의 최후통첩을 준비중이었고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위한 30일의 통첩을 준비중이었다.

<「통킹」만 사건>
64년 8월 5일 「로버트·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통킹」만 순찰의 주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미국이 전 세계의 공해 상에서 벌이고 있는 정규적인 순찰업무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뉴요크·타임스」지가 보도한 국방성 연구 서에 의하면, 「통킹」만의 순찰은 월맹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심리적 효과와 구축함에 장치된 기구로 월맹해안경비 및 「레이다」에 대한 각종 정보를 입수하여 월남군의 폭격을 용이하게 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월맹 본격적 전투의 개시>
64년 8월 6일 「맥나마라」국방장관은 「통키」만 사건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월남함정과 월맹함정이 관련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있는가 라는 질문에 『전혀 아는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국방성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본격적인 대 월맹군사작전은 64년 2월 1일『작전명령 34A호』에 의해 이미 시작됐으며, 7월 30일 자정을 기해 「웨스트모얼랜드」 주 월 미군사령관의 지휘아래 월남해군특공대가 「통킹」제언 안의 월맹영토인 「혼미」와「혼니우」 두 섬을 공격했다.
미국은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를 공격한 월맹군함이 「매독스」호를 월남군함으로 오인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미군의 전면개입 시기>
65년 7월 28일「존슨」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월남에 군대를 증파하는 것이 현 정책의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목표의 변경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문제의 국방성 보고서를 보면, 7월 중순께 결정한 20만 명의 병력 증파는「아시아」전쟁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이 최초로 인정됐으며, 전투는 장기화할 것으로 보여 미군의 잇단 증파가 뒤따르게 됐다고 기술돼있다.

<「존슨」의 공격전략 결정 시기>
「존슨」대통령은 65년 4월 1일의 기자회견에서, 『월남에서일시 귀국한 「테일러」장군이 새로운 제안을 갖고 왔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어떤 극적인 제안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극적」이라는 표현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현재로는 제안되거나 전달된 아무런 새로운 전략도 알고있지 못한다고 말했다.
「존슨」의 이와 같은 답변은, 작년 4월 6일자 국가안보조치각서 3백 28를 보면, 얼마나 국민을 기만한 것인가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각서에 의하면 「존슨」이 기자회견을 하던 바로 이날 그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몇 가지 결정을 승인했다.
첫째 국방성 중앙정보국장이 제안한 12개의 제의를 즉각 검토할 것을 승인하고, 둘째 18만 명에서 20만 명의 미군을 증파하며, 셋째 그때까지 방비임무만을 맡고있던 해병대에 공격임무를 수행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승인했던 것이다.

<북폭 결정 시기>
「존슨」대통령은 64년 9월 25일 연설에서 『미국이 결국엔 보급로를 제거키 위해 북진을 하고 북폭을 감행함으로써 확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미국은 결코 미국의 아들들이 「아시아」에서 전쟁을 수행키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슨」행정부는 64년 9월 7일 열린 「백악관전략회의」에서, 월맹에 대한 공중폭격의 가능성을 일단 거의 합의했음이 국방성 보고서에 기록되어있다.
단지 잠정적으로나마 북폭이 지연됐던 것은 당시 전면 북폭을 주장하던 공화당의 「배리·골드워터」 대통령후보의 정책에 동조할 수 없었던 선거전략 때문이었음이 「뉴요크·타임스」의 폭로기사로 밝혀졌다.

<북폭의 진정한 이유>
65년 2월 7일자 백악관성명에 의하면 월남의 「플레이쿠」지역에 주둔한 미군의 두 막사에 공산군이 기습을 가해옴으로써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말하고, 이러한 계속적인 도발을 막기 위해 「롱킹」만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공중폭격만이 가장 적절한 조치이므로 북폭을 하는 것이지 결코 전쟁을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발표됐다.
그러나 65년 2월 7일자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 「맥조지·번디」씨의 「존슨」회고록에 의하면, 월남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보복폭격의 정책을 확대하고 실시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이라고 미국정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플레이쿠」사건과 갈이 뚜렷한 공산군의 도발행위에서 비롯된 보복조치가, 후에는 성장의 피살사건을 꼬투리로, 심지어 「사이공」 시내의 「카페」에서 발생한 수류탄투척사건에 까지 구실을 붙여 보복조치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보복조치는 구구한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이 오직 전쟁의 승리를 위해 취해진 것이었음이 「번디」의 회고록에서 밝혀졌다.

<헤럴드·트리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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