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8선 돌파와 북진(7)|평양으로(4)|「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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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양으로 일로 쇄도하는 국군 제1사단의 진격 상황을 다시 한 연대장으로부터 들어보겠다. 당시 평양공격을 직접 진두에서 지휘하고, 휴전 후부터 현재까지 국제정치학파 전사를 연구해온 이 증언자의 회고에는 여러 가지 새 사실과 음미해야 할 많은 교훈이 담겨있다. 그리고 또 38선부터 평양 입성까지의 진격상황이 그림에 그린 듯이 선명하게 부각돼 있다.

<이북중요도로 파괴 안돼>
▲김점곤씨(당시 1사단12연대장=중령·예비역 육군소장·현 안보국제문제연구 소장·주한 코스타리카 명예 총영사·경희대 교수·48)『고낭포를 넘어 일로 평북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평가도의 교량과 길이 파괴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있어요. 철도와 철교도 그렇고요. 38이남의 주요도로와 교량이 폭격으로 모두 파괴된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고차적인 전략의 결과로 보아야겠는데 북진을 용이하게 하려고 그랬는지, 또는 북괴의 전쟁물자 수송을 남한까지는 쉽게 오도록 해 놓고 파괴하려는 계산에서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길과 다리가 갈망해서 북진하기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루에 보통30∼40km씩 올라갔어요. 북진하면서 각 고을을 점령하고 보면, 농장에는 살찐 돼지와 닭 등 가축이 그대로 있고 배급소에는 식량과 명태 등이 가득히 있어요. 이래서 손쉽게 식량과 부식을 조달할 수 있었지요. 괴뢰는 가축들을 일일이 등록시켜 놓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함부로 잡아먹을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우리 1사단은 12연대를 공격에 앞세우고 11연대와 15연대는 뒤따르는 공격 제대로 북진했어요. 12연대가 앞강선 것은 미제1군단의 제6전차대대의「탱크」(M·46)가 우리 12연대를 지원했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1개소대의「탱크」5대를 붙여 주고, 보전협동을「테스트」 합니다.
그때까지는 우리는「탱크」가 앞장서고 보병이 뒤따르는 줄만 알았어요. 한데 지원 나온 미군「탱크」소대장은 국군보병이 앞장서고 지뢰등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국군보병이「탱크」를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미군「탱크」가 지원 안 해 주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앞장을 서야할 판이니까 그들 주문대로「탱크」를 잘 보호 (?) 해주었어요. 그랬더니 그 소대장은 저희 중대장에게「미군보병보다 한국군이 보전협동을 더 잘한다」고 보고했어요. 이 러자 그 이튿날 미군중대장기 직접 자기「탱크」중대를 이끌고 지원하러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연대에 22대의 미군「탱크」가 따라 붙은 겁니다.

<미 탱크 50대 1사단 지원>
나중에는 제6「탱크」대대장이 2개 중대와 대대본부를 데리고 나와 무려 50대가 넘었어요. 견이 넓지 못하고 회랑지대가 많아 보통「탱크」5대를 전개하고 나섰어요. M-46은 길 없는 논바닥도 거뜬히 잘 달립디다. 교량도 사고 없이 지나가고요. 이걸 보니까 6·25전에 미군사고문단장인「윌리엄·L·로버트」준장이「탱크」전문가랍시고「한국에는 수 전이 많고 길이 좁고 다리가 약해 탱크는 사용할 수 없다」고 우겨대던 일이 얼마나 과장적 관찰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옇든 걱정이 없을 때에는 우리 사병들이「탱크」위에 빽빽이 올라타고 갔어요. 이루게 북진하는 동안 미제 l기병사단과는 기묘한 경쟁이 벌어졌는데 우리가 기동력은 약하지만 주야 겸 행으로 진격하여 좀 앞서는 형세였어요.
우리 사단에는 미군 대공 연락 반이 따랐는데 이들을 시켜 공중에 뗘 있는 정찰기에「미 기병사단이 어디까지 뫘느냐」고 물으면 비행사도 미군이지만「지금 귀 사단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는 식으로 알려주기도 합디다. 이렇게 진격을 하다가 시 변리 북쪽에서 적의 기습을 받았어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우리연대의 1개 대대가 50여대의 미「탱크」에 올라타 먼저 배상하고 나머지 2개 대대가 도보로 뒤따르고, 내 연대본부는 그사이에 끼어 있었어요. 나는 앞뒤 대대와의 연락을 위해 늘 무전기를 열어놓고 있었는데 이때 한밤중인데 앞 대대와의 연락이 잘 안 돼 앞으로 더 빨리나가 어떤 마을에 이르렀어요. 여기서 갑자기 적으로부터 맹 사를 받아 길옆의 후미 진 곳으로 냅다 뛰어 엎드렸어요.
가만히 생각하니 작전지도를「지프」안에 그냥 놓고 왔기에 안되겠다 싶어 도로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 벌써 괴뢰군 장교 2명이 내「지프」를 기웃거리고 있어 이들을 경보 주임 문중섭 대위와 함께 처치하고 지도를 도로 찾았어요. 그후 괴뢰군 사병 2명이 어둠에서 불쑥 나와 내 목덜미를 잡는 바람에 격투가 벌어져 다시 문 대위의 가세로 이들을 잡았는데 어린 소년 병들이에요.

<적 고사 포 여단이 주로 저항>
이들 포로를 심문해보니까, 이적은 고사 포 여단으로 앞의 미군「탱크」와 우리 1개 대대가 모르고 그냥 스치고 지나간 틈을 타서 우리 연대본부 원들을 생포하려고 했던 거예요. 새벽에 내 무전기로 앞 대대와 연락이 돼 이 사실을 알렸어요. 이래서 북상하던 앞 대대와 미군「탱크」들이 남쪽으로 진용을 돌려 대기하고 있다가 적고 사포여단을 섬멸했습니다. 뒤따르던 2개 대대도 이 소탕전에 참가하여 많은 포로를 잡았지요. 나는 이때 노획한 적 고사 포의「포대 경」을 지금도 기념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후도 이런 혼전이 한번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는 6·25초에 연대기를 배에 두르고 한강을 헤엄쳐 건넌 오 중위가 전사했어요.
그리고 상원 남방에서 벌어진 피 아의「탱크」전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미군1개「탱크」소대가 앞서 가다가 동 수의 적「탱크」와 정면으로 부닥쳤는데 너무 근거리라 서로 쓰지를 못했어요. 선두전차가 뒤 전차에 무전 연락을 하고 뒤로 뺄 때 뒤 전차에서 재빨리 쓰니까 적 선두 전차에 불이 붙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4대의「탱크」는 그대로 도망쳐요. 그런데 수동의 미「탱크」병이 포 탑을 열고 나오더니 잇달아 뛰어나온 선두「탱크」병과 얼싸 안고 기뻐해요. 보니까 얼굴이 똑같은 쌍 동이 형제입디다. 정말「형제는 용감했다」지요. 상원을 지나 평양을 수십 리 앞두고 괴뢰의 평양 방어부대와 부닥쳤어요. 길 양편에 절벽이 동서로 곧게 뻗은 곳인데 괴뢰군은 이런 유리한 지형에 포진하고 완강히 저항해서「탱크」 가 나갈 수가 없게 됐어요. 이날 밤 사단장·참모장·각 연대장 등이 작전회의를 했어요.
이 회의에서 우리 12연대는 절벽을 돌아 나가라는 등 여러 가지 작전 안이 거론됐지만 나는 절벽을 우회하면 날짜가 걸린다고 반대했어요. 결국 어떤 때가 정면으로부터 김을 뚫기로 결정 돼 밤새도록 공격을 계속, 이튿날 새벽에는「탱크」가 나갈 수 있게 됐어요.
북진 때 미군단과 한국군단, 사단과 사단끼리 진격 경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지만 같은 한국군사단내에서도 연대끼리 경쟁이 붙기도 했어요. 12연대가 앞서의 절벽 길을 뚫는 동안 미군「탱크」는 좀 뒤에 처져 있었는데 어느새 12연대가「탱크」를 호위하면서 자기들이 앞서가겠다는 겁니다.

<청일 전 때 일군전법 거론도>
자연히 옥신각신 이 벌어질 수 밖 에요. 미군「탱크」부대가 보전협동 경험이 있는 우리 12연대와 같이 행동하겠다고 해서 결말이 나긴 했지만 이 통에 아마 진격이. 3시간정도는 늦어진 것 같아요.』여기서 김점곤씨의 증언은 잠시 쉬고 이번에는 그 사단작전 참모가 밝히는 평양공격의 비화를 한 토막 들어보겠다.
▲석주암씨(당시 1사단참모장=대령·예비역소장·현 한약재사업·56)『상원을 지나 외길을 따라 처의 평양 근처에 갔을 때예요. 1사단은 김점곤 증언의 연대가 미군「탱크」의 지원을 받으며 앞서가고 있었는데 길옆 양쪽 절벽 위에서 적의 맹렬한 사격을 받았어요. 직사포를 감추어 두었다가 마구 쏘아대는 거예요.
이래서「탱크」가 못나가고 진격이 멎었어요. 이날 밤(18일) 사단장·각 연대장·탱크 중대장(미군). 미 고사 포 여단장을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어요. 이 회의에서 청일전쟁에 일본군이 청군수비의 평양을 공격하던 대로 조재미 중령의 15연대를 우회시키고 11, 12연대는 정면을 맡게 결정했어요. 이날 밤 회의에서 나는 고사 포와「탱크」포 등 각종 화력으로 평양 시가지를 강타하자고 했어요. 나는 해방직후 만주의 신경서 소련군이 2차 대전 때「베를린」이 공격하는데 야간에 수많은 포로 집중타를 퍼붓고 점령하는 영화를 인상깊게 보아두었어요.

<11연대서 평양 비행장 점령>
백선엽 사 단장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평판의 건물을 어떻게 파괴하겠느냐고 망설입니다. 특히 백사단장은 평양이 자기 고향이니까 조금이라도 덜 파괴하고 들어가고 싶었을 거예요. 그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사단장에게「명예냐 금전이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라고 했어요. 백 장군은「금전이라니?」하며 발끈 화를 냅니다.
나는 바로 이점을 노린 거예요. 그때 30안팎의 지휘관들은 더러 물욕과 결부시켜 비만하면 제일 싫어했어요.「평양의 건물을 건지려는 것은 결국 금전을 건지려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하고 괴리로 되물었어요. 이래서 포격하기로 결정하고 밤새껏 때렸어요. 새벽에 우리 병사가 적의 유선 전화 줄을 따라 도청을 했더니 적병들은「이제 다 틀렸으니 후퇴한다」고들 연락을 하드래요. 곧 진격을 개시했는데 맹 포격 후 인지라 적 저항은 별로 없었어요.
12연대와 11연대가 서로 앞장을 서려고 옥신각신 한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11연대는 평양비행장을 점령하고, 12연대는 계속 미군「탱크」지원을 받으며 앞서 가도록 했어요. 나는 1사단이 거의 평양에 돌입, 점령하는 순간 타고 있던「지프」가 지뢰를 밟아 두발에 부상을 입고 후송됐습니다.
평양시를 바로 눈앞에 보면서도 후송의 신세가 되니 상처보다도 마음이 더 쓰라리더군요.』
※알림=중공군이 처음 한국전에 개입했을 때 이들을 사로잡았거나 또는 그 보도들을 심문한 분은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연락처=중앙일보 편집국「민족의 증언」담당자 앞 전화 (28)82l1(교환)의 74번, 야간은(94)3415 (서신 연락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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