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8선 돌파와 북진(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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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양으로>(3)
미 제1기병사단이 적2개 사단을 포위한 금 천 지역의 섬멸전은 10월13일부터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두 석 산을 정면으로 공격한 미 제8기병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측되는 북괴군은 탱크·야포·박격포·기관총 등 모든 화력을 총동원해서 미8기병연대의 공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 전투에서는 한국전쟁에서 보기 드문 탱크 전까지 전개되어 13일 하루 사이에 퍼싱 미군 탱크 대는 T-34 소제북괴군 탱크 8대를 접근 전에서 파괴했다. 성능이 T-34보다 우수한 미 퍼싱·탱크의 손해는 전무였다.

<적, 평양방어의 주력 잃어>
미 8기병연대는 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공격을 강행하여 14일 낮까지는 두 석 산의 적 진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적이 여기서 상당히 버틴 것은 금 천 부근의 다른 부대를 후퇴시키기 위해 두 석 산 진지를 14일 밤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제5기병 연대는 13일 저녁에 금 천 동쪽고지에 진출한 후 야간에 읍내에 진입 우왕좌왕하는 적병을 소탕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연대는 각각 1개 대대를 가지고 국도연변의 남-북 지역을 소탕하려고, 제2대대는 북진하여 한 포 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2천5백 명의 적부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미 7기병연대와 접전 중인 것을 발견하고 배후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적을 분산시켰다.
남진한 제3대대도 두 석산 북쪽의 적을 소탕하고 14일 정오에 정면을 공격하던 제8연대와 악수했다. 이렇게 5일간에 걸친 금 천 포위 작전은 적2개 사단을 섬멸하고 큰 성공으로 끝났다. 잔존병력은 장비를 버리고 산 속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의지하던 평양 방어의 기간전력은 없어진 것이다.
한편 북괴의 6·25전사인 소위「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 전쟁 사」에는 유엔군의 35선 돌파와 그 후의 전황이 아전인수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950년 10월1일에 최고사령부는 38선의 방어임무를 양분해서 서부는 서해안방어사령부 (최용건 대장)에, 동부는 전선사령부(김 책 대장)에 담당시키고, 최고 사령부의 작전예비 대를 38선 일대에 파견했다. 38선 일대의 방어부대에는 적의 진공을 저지하고 타격을 주어 시간을 벌어 남반부에 남아있는 주력의 탈출을 보장할 임무가 부여됐다. 남반부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적은 아군주력이 38선 이북의 기본전선에 도달하기 전에 전 한반도를 점령하려고 속전속결의 전술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의 진출을 기도했다.

<적 전사, 선전했다고 억지>
적은 주 타격방향을 개성∼평양에 두고 10월7일에 개성을 점령한 후 금 천 방면을 향해 침공을 개시했다. 한편 중부와 동부지역에서 행동중인 적은 10월3일, 동두천과 춘천을 점령하고 연 천·화 천 방면으로부터 침입하고, 동해안의 적은 10월1일 양양 지역에서 38선을 넘어 10월5일에 통 천 지역을 점령했다. 전선서부의 아군부대는 고랑포로부터 옹진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방어에서 완강히 싸웠다. 미제1군단은 10월8일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아군부대는 우세한 적 공격을 저지하면서 11일까지 헌신적으로 싸웠다.
아군의 대전거포병과 복병 조는 우세한 적 전차의 내습을 대담하게 요격 소탕하고, 습격 조는 적의 집결지, 전차 및 포병 진지를 기습해서 적을 혼란케 했다. 적이 송악 산을 점령했을 때 아군은 강력한 반 돌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소탕하고 10월11일에는 재차 송악 산을 탈환했다.
연안방면에서 행동중인 아군부대는 완강히 싸워 11일에는 백 천 지역에 진출한 적에 반 돌격을 감행하여 적 공격을 좌절시키고 그 진격을 지연시켰다.
전선동부에서는 고랑포로부터 양 구로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적 제2군단의 맹렬한 공격을 견제하면서 10월9일까지 철원을 고수했다. 화 천을 방어하던 아군은 훈련을 받지 않은 부대였지만 10월5일부터 9일까지 적 제2군수의 공격을 저지하고, 그 후 금화지역으로 이동해서 이틀간 맹렬한 전투를 계속했다. 낙동강 북부의 아군부대는 적 배후에 타격을 가하면서 조직적으로 후퇴하여 드디어 적 포위로부터 완전히 탈출했다.』
다시 미군과 영 군의 전황.
금 천을 돌파한 미제1기병사단은 다음 목표를 사리 원에 두고, 10월15일 아침 제5연대의 제2대대로 우선 남 천을 공격케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적은 금 천에서 큰 타격을 받았는데도 맹렬히 저항하여 4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정오에야 겨우 읍내에 돌입했다.「프랭크·밀번」장군은 사리 원에서도 또 한바탕 격전이 벌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미 제24사단에 남방으로부터 사리 원을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제5기병연대의 목표를 서 흥으로 변경했다. 사리 원을 동남방으로부터 협공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미 두 사단, 사리 원 입성 경쟁>
16일에 예정대로 제5기병연대는 서 흥을 탈환하고 미제24사단은 해 주 북동 측과 청석두리에 진출하여 각각 17일의 사리 원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밀번」군단장은 미제1기병사단과 미제24사단에『사리 원에 제일먼저 돌입한 사단에 평양 일착 입성의 영예를 갖도록 해주겠다』고 말하여 경쟁심을 부채질했다. 이래서 한동안 평양 입성경쟁에서 탈락됐던「존·H·처치」소장의 미제24사단도 다시 희망을 갖게되었다.
그러나 24사단은 진격 로가 원거리인데다가 보급로도 좋지 못해 미제1기병사단에 비해 모든 조건이 몹시 불리했다. 이때 모든 북진부대를 사로잡은 생각은 각 사단간에, 그리고 사단 안의 각 연대나 대대가 서로 평양에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쟁심 때문에 서 흥 남방에서는 우군끼리 충돌하여 7명의 부상자를 내는 불상사도 빚어냈다.
한편 금 천 전투에서는 천마산 중에서 헤매다가 참전기회를 놓친 영국군 27여단은 서 흥을 출발하여 사리 원을 향해 진격을 개시, 17일 낮에 적의 주 저항진지로 예상되는 동 측 고지대에 접근했다. 적은 과수원에서 영국군에 맹 사를 가해 접전이 시작됐으나 곧 기관총10정과 대전거포4문을 버리고 궤 주 했다. 영국군 제1대대는 계속 전진하여 17일 저녁에 초토화한 사리 원에 돌입하고 이어 영 여단내의 호주 군 대대는 북방고지까지 진출했다. 이렇게 해서 사리 원에는 미제1기병사단이나 미제24사단도 아닌 영국군 여단이 제일먼저 들어간 것이다.

<연락병 잡히자 적 부대 투항>
한편 미제7기병 연대는 17일 하오에 황 주 동남쪽으로 진출하여 주력으로 황 주를 점령하고 제1대대는 사리 원으로 남하시켰다. 제1대대는 국도를 따라 남하하다가 사리 원 북방고지에서 유력한 적과 부닥쳤다. 이 적은 영 여단의 호주군대대가 18일 새벽 공격하려던 부대였다. 미군 제1대대는 즉시 공격을 개시했는데 이때 한국군통역장교가 꾀를 짜내 적진에 접근하여 큰 소리로『우리는 급히 너희들을 구원하러온 소련군이니, 사격을 멈 추라』고 외쳤다.
이러 자 곧 사격이 멎고 일단의 북괴군이 연락하러 제l대대장「크레이노스」중령한테로 왔다고 이들을 미군1개소대가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키려고 하자 그중 2∼3명이 반항의 기미를 보였다. 소대장이 그중 1명을 재빨리 사살하자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수백 명의 괴뢰 병들이 호에서 일어나 이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투항하여 이 지역에서만 1천7백 명의 포로를 얻었다. 제1대대는 얼마 안 있다가 바로 남쪽에 있던 호주 군과 연결했다.
한편 좌익의 미제24사단은 평양 입성의 새 희망을 안고, 제21연대는 해 주를 탈환하고 제19연대는 신원 리-재령-사리 원 도로를 신나게 북상했는데 미제1군단장「밀번」소장은 사리 원이 이미 영군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우군끼리의 상충을 염려하여 24사단에 진격중지명령을 내렸다. 24사단의 평양1착의 꿈은 하루만에 영영 사라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이미 제24사단은 대전전투에서「딘」사단장을 잃는 등 여러 모로 운수가 좋지 못했다.

<적병, 소군 착각 영 군과 악수>
18일 밤에 영국군이 확보하고 있는 사리 원에서는 추격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기한 일들이 속출했다. 제1대대장「네스리·니슨」중령은「지프」차로 사리 원 남쪽을 순찰 중 도로 양측을 도보로 북상하는 적 부대 종렬 속에 들어가게 됐다. 운전병은 전속으로 차를 몰아 이탈했다. 이적부대는 재령부근에서 미24사단에 격파된 괴뢰군제43사단의 주력으로서 사리 원이 이미 함락된 것을 모르고 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우스운 일은 괴뢰군이 미군과 군복이 다른 영국군을 소련 병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떤 괴뢰병사들은 영국군을「동무」라고 부르며 악수를 청하는가 하면, 군 모의 붉은 별을 떼어 기념으로 가지라고도 했다. 한 영국군 소대장은 어떻게 하다가 적병 속에 끼어 들게 되었는데 엉겁결에「로스케」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했더니 그들은 수고한다고 등을 두 서너 번 두 드려 주었다. 이런 실수는 영국군도 마찬가지로 저질렀다. 사리 원에 들어오는 괴뢰군을 미제24사단에 편입된 한국군이 이재서야 들어오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멍청히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앞서의「니슨」중령이 사리 원 남방에서 부닥친 괴뢰군 2열 종대가 시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모든 사태를 파악한 영국군의 호주군대대가 탱크로 적 대열 앞을 가로막으며 『포위됐으니 투항하라』고 소리치니까 잠시 망실이다가 선두「그룹」이 총을 놓았다. 뒤「그룹」도 이에 뒤 따라 호주 군대대는 이날 밤 단숨에 1천9백80명의 적병을 사로잡았다. 영국군으로서는 한국 참전 후 처음 거둔 대승이었다.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 전화는 (28)82l1 (교환)의 74번, 야간은 (94)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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