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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제자는 필자>|<제13화>방송 50년(9)|이덕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나운서>
경성방송국은 l935년쯤에 이르러 요람기를 벗어나게 된다.
부산방송국 등 지방 국이 생김에 따라서 아나운서의 교류도 있게 됐다. 이해에 편성을 보아 오던 이하윤씨는 컬럼비아·레코드사의 문예부장으로 가고 박충근 아나운서는 부산 국으로 전출했다.
이해에 윤백남·김정진씨에 이어 제3대 제2방송 과장으로 취임한 분은 천풍 심우섭씨(작고)로 기가 크고 배가 나온 호걸형의 인물로 야인 적인 풍모가 있었다. 방송국에 오기 전에는 신문기자로 있었는데 소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의 맏형 되는 사람이었다.
호걸 풍의 인물이었지만 결백 벽이 있어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다가도 술상에 담배를 비벼 끄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등신경이 섬세한데 까지 뻗치고 있는 분이었다.
36년으로 기억되는데 서순원씨와 이계원씨(모두 고인)가 아나운서로 들어 왔었다. 서씨는 작은 키에 다부지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열 몇 살 때 중국에서 장학량 인가 장작림 인가를 단독 회견했다는 일화를 지니고 있었다.
술을 잘해 50여 원 받는 월급봉투가 항상 비었고, 빛 갚기에 쩔쩔매곤 했다. 동료들에게도 빚 투 성이었다. 이를 보다못한 심우섭 과장은 자신이 거래하던 금융조합에서 빛을 내어 서씨의 사내 빚을 모두 갚게 하고는『다시는 그 러 지 말라』고 훈계하여 마치 큰 형님과 같은 풍 도를 보여주고 했다.
서 아나운서는 중앙불교전수학원을 나왔는데 당시 아나운서는 대개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졌지만 학교에서 우리말을 재대로 배우지 못해 발음이 자주 틀려 난센스를 빚었다.
한번은 아나운서가 수출의 발음을 유출이라고 읽었다. 심 과장이『이 사람아 그게 수출이지 유출인가』하고 바로잡아주자 서 아나는 드리어 유출이 옳다고 주장하여 사전이 동원되는 난리가 났다.
또 한번은 서 아나운서가 뉴스 방송 중『팽 대를 하사 하셨습니다』고 발음했다. 방송을 듣던 과장이나 직원들이 모두 팽 대(붕대)가 무엇인지 갸우뚱하다가 서 아 나에게『그 팽 대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서씨는『상처가 났을 때 감는 천 말이요』하고 대답해 결국 붕대를 잘못 발음한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서씨는『사전을 보시오』하고 우겼고 사전을 찾아보니「붕」고어「팽」등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결국 절대적인 잘못은 아니라는 이론이 성립되어 버렸다.
서 아나와 같이 입사한 이계원씨는 얼굴이 가무잡잡한데 목소리가 굴고 자질구레한 데까지 설명하여 친근한 맛을 주어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37년에 아나운서로 송진근(월북)과 이상붕이 들어와서 새로운 방송 스타일을 형성하는 바람에 아나운서가 이계원 파, 송진근 파로 갈리게 되었다.
이계원씨는 능숙한 말씨와 자상한 설명으로 인기가 있었고 송진근은 깨끗한 말씨로 팬을 끌었던 것이다.
송과 이상붕은 둘이 같이 보전출신인데 아마도 우리 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아나운선 공개모집 시험을 거쳐 데뷔 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보다 l년 늦은 38년 4월에 이 현씨(방우 회장·방송회관 이사장), 고제경씨(동화통신 부사장), 심형섭(납북), 정국성(재 이북)등. 4명이 공개시험을 치러 아나운서가 되었는데 이 때의 경쟁률이 12대1이었고 두 번째 공개 시험으로 되어 있다.
이 현씨는 법전, 고·심·정 3명은 연 전이었다. 이때 갈이 아나운서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 중에 김학묵씨(대한적십자사 사무국장)가 있었으나 김씨의 아버지가『그런 것 하면 사람 버린다』파하여 한사코 말려서 김씨는 아나운서를 단념하고 관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는 방송국에 아나운서는 있었지만 기자란 직업은 없었다. 아나들은 배달되는 통신을 보고 자기가 제목을 붙이면서 마이크 앞에서 읽어야 했다. 경성방송국의 아나운서 실은 제3 스튜디오 옆에 있었는데 한-일 아나운서가 같이 한방을 썼다.
통신은 1부만 배달되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에 일본인 아나운서들이 먼저 통신을 잡아 나갈 만한 것을 뜯어 책상 위에 쭉 놓았다가는 방송시간이 되면 거둬 가지고 방송실로 들어갔다.
마이크를 2개 놓고 한-일 아나운서가 각각 앉았는데 먼저 일본인 아나운서가 읽는 것이 제1방송이고 그 읽은 일본어 원고를 받아 머릿속에서 번역하고 입으로 한국말 방송을 해야하는 것이 즉 제 2방송이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마이크 앞에 서기전에 대강 통신을 훑어보아 내용을 짐작하고 들어가지만 어떤 때는 전혀 내용을 모르고 들어가서 당황할 때도 많았다.
특히 일본인 아나운서들은 통신을 읽은 뒤 한국인 아나운서에게 넘겨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간교한 일본 사람들은 읽은 원고를 살그머니 책상에 놓고 곁눈으로 훑어보며 방을 나가면 묵묵히 기다리던 한국인 아나운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 통신을 읽었다.
읽는 것뿐 아니라 일본인이 뉴스시간을 초과했을 때는 그 초과된 만큼 빨리 하든가 잘라야하는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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