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와이대 국제학술회의 발표 논문초|이기문(서울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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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어>한자를 매개로 표기|언어단일화는 통일신라 때
한국어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언어적 통일이 성취되고 그것이 문명어로 성장해온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고대에는 북방에 부여계 제어, 남방에 한계제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남아있는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의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그들의 친족관계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단일언어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분립상태에서 언어적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진 것은 7세기 이후이며 통일신라3백년은 단일어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건국으로 그 기틀이 굳어져 개성방언이 중앙어로 등장한 이래 오늘까지 계속되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어는 중국어와 접촉하여 그 엄청난 간섭을 받아왔다. 이 간섭의 가장 큰 결과는 한문이었다. 입으로는 한국어를 말하고, 글은 한문을 쓰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자의 음과 석으로 고유명사뿐 아니라 향가까지 표기하려는 방법이 고대에 발달했으나 이것은 그 뒤 쇠퇴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일본으로 건너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자로 토착 어음을 적는 방법을 처음 개발한 것은 한국이었으나 일본에서 만섭가나 이래 이 방식을 발전시켰다. 한국과 일본에 있어서의 이 쇠퇴와 성공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 주된 이유는 양국어의 음절구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음절구조가 복잡하여 그것을 표기하기에는 수천의 한자로도 오히려 부족했는데 일본어의 음절구조는 지극히 단순하여 수백의 한자로 족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한자차용표깃법의 쇠퇴는 그 한화의 심도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그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한국이 훨씬 더 한화하였다고 할 수 있는 15세기에 훈민정음이 창제된 사실이 이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요컨대 한국인은 자국어의 표기수단을 추구함에 있어 번잡하고 비능률적인 한자차용표깃법을 버리고 전혀 독창적인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중국어의 국어에 대한 간섭은 특히 그 어휘에서 현저하였다. 한자어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한국어의 순수성을 해친 것은 사실이나 하나의 문명어로 성장하는데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어가 순수한 의미의 차용어가 아니요, 한자를 매개로 한 것이라는데 큰 문제가 있다. 한자들의 새로운 결합으로 신어를 만들어내는 힘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어와 한국어의 경우는 인류 역사상 오래이고 심각한 언어접촉으로서 유례가 드문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어와 같이 스스로의 구조와 개성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은 더욱 드문 일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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