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학계서 심판 받는 한국학의 성과-하와이 대「국제학술회의」발표 논문초(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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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손실기<연세대 교수>
한국에 있어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에 대한 관심은 오랜 일이 못되며 또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20∼30만년 전까지 소급해 인적을 찾는 매우 중요한 선사문화의 발굴 작업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구석기 문화의 유적지는 함북의 동관진·굴포리·부포리와 충남 공주의 석장리 등지에 불과하며 앞으로 한강·낙동강 및 수원·안성 지역에서도 그 확인하는 작업이 베풀어질 것으로 믿는다.
한반도에서 처음 제기된 구석기시대의 문화는 1940년 일인「나오라·노부오」교수가 발굴한 웅기 인근의 동관진 유적이다. 이 유적에선 새기개(조각도)로 보이는 석기 1점과 흑요석 1점 및 괭이나 창끝 같은 골각기가 많이 됨으로써 구석기 문학의 가능성이 시사됐는데 당시 학계는 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동관진 유적은 중석기문화로 추정된다.
동관진에서 멀지 않은 굴포리유적은 63년 구총의 조개껍질을 비료로 쓰려고 파다가 나타났다.
이 유적은 두시기의 문화층을 갖고 있었는데 하층(굴포1기)이 중기 구석기시대, 상충(굴포2기)이 후기 구석기시대로 2만년 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굴포1기 문화층에선 주로 석영으로 된 석기(모두들 조각)가 50여 편 채집됐고 집 자리도 보였는데 일시적인 간이주거지로 해석했다. 굴포2기층에는 주거지가 없었지만「시베리아」것과 연관되는 격지 갈래(박편석기) 가 주로 채취됐다. 1기의 모두들이 외날인데 비하여 2기의 석기에선 쌍날도 더러 보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금강유역의 석장리 문화는 시대의 폭이 넓고 유물도 아주 다양하다. 이곳에는 전기·중기·후기의 선주민들이 거쳐간 흔적이 역연한 것이다. 물론 그 3기의 인종이 같다고는 볼 수 없으며 현대 한국인의 간접 조상은 될지라도 직계는 아니다. 각 시기의 인종은 그 때마다 멸망했을 것이다. 또한 후기 구석기 시대의 1만8천년 전 간빙기에는 빙하가 녹음에 따라 민족 이동이 일부 북상하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연관될 것인지 난제로 남아있다.
석장리 Ⅱ지구의 최하층 유물은 석영질이 주된 것이며 잔손질을 하지 않은 거친 석기들이다. 찌르개로는 동물을 잡고 글개로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2, 3층의 출토품은 자갈들을 직접 떼기한 것들로서 다목적 석기로 쓰였을 것이다. 4, 5층의 것도 15만년 이전의 전기 구석기에 속할 것이다.
그 위층에 다시 중기구석기 문화가 2층으로 덮였는데 제1층에선 모두들 떼기에 의한 석기제작 작업장이 발견됐다. 석영을 중심으로 반암·편마암 등 3개종이 한자리에서 나왔고 가까이에 돌망치(공구)도 있었다. 제2층은 4∼6명이 살면서 제작해 쓴 자리로 해석된다. 모루망치로 떼어 낸 석기가 많은데 자갈들에 쌍날 찍개가 적지 않은 점 등 주구점의 그것과 형태가 매우 같다. 4∼1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석장리 I지구의 표토 바로 밑은 후기 구석기에 속하며 석영질의 석기가 희소했다. 상층은 카본·데이팅에 의해 3만6백90년으로 확인됐다. 그 하층은 노지를 복만에 둔 주거지임이 뚜렷했는데 2만8백25년으로 추정됐다.
이 주거지는 돌담을 돌렸고 남쪽 입구 쌍으로 문들을 세웠다. 담 안에선 작고 고운 석기가 보였고 밖에 격지 부스러기가 있음은 도구제작의 자취일 것이다.
돌은 불을 일으키는데 쓰이는 갈청광이 많이든 흑운모「슈스트」암이 많다. 또한 자갈돌 표면에 물고기·사람·작살 등 선각의 그림이 보였고, 특히 개 형상의 돌이 출입구를 지키며 물고기 곁에서 새가 지켜보도록 배치한 점등은 극히 주목된다. 이러한 것은 가축을 길들일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암시하는 것 같으며 훅은 원시적 신앙과도 관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봄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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