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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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가 있으면 「너」가 있듯이,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다. 「나」가 어디서 있느냐에 따라서 「이쪽」과 「저쪽」도 달라진다.
「이쪽」에 있다가도 「저쪽」에 옮겨가면 「저쪽」도 「이쪽」이 된다. 그러면 「이쪽」이 「저쪽」이 된다. 그러나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서로 자리를 옮기며 접근하면 양쪽이 일치할 수도 있다.
그런 때는 어느 쪽인가를 가릴 필요가 없게된다.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는 것에 교문이 있다. 교문을 사이에 둔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것은 없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게 교문이기도 하다.
그런 교문이 왜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되어버렸을까. 왜 「이쪽」과 「저쪽」은 반드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야만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연막탄 때문일까? 곤봉과 돌 때문일까? 이제는 그 교문마저 굳게 닫혀있다. 아무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갈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이쪽」은 「이쪽」, 「저쪽」은 「저쪽」. 양쪽에 다리를 놓을 수는 정말 없다는 얘기일까.
그러나 교문 안이라고 모두 한편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 안에서도 또 「이쪽」과 「저쪽」이 갈라져가며 있는 것 같다.
「이쪽」이 아니라고 반드시 「저쪽」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지 못하는 쪽이 또 있기 때문이다. 교수의 입장이 그것이다.
학원의 자유에는 원래 「수업의 자유」(Lehrfreiheit)와 「탐구의 자유」(Lernfreiheit)의 두 개가 있다. 그러나 전자는 늘 「이쪽」과 「저쪽」에서 무시되기 일쑤다.
그런다고 또 어느 쪽도 항의하는 일도 없다. 이래서 같은 교문 안이면서도 학생과 교수는 서로 단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라고 보게되는 풍토가 딱할 뿐이다.
서울대학교 당국이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동문들에게 축전을 보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이라지만 학자만 배출하라는게 대학은 아니다.
대학의 번영을 위해서는 학자보다는 국회의원이 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틀림없겠다.
그렇지만 서울대학교당국의 이 전례없는 축전이 이상한 이화감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딘가 대학과 학생사이의 의식의 단절을 보여주는 얘기 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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