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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강국 코리아' 되살릴 묘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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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김용환
수출입은행장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진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불을 내뿜는 용머리와 두꺼운 개판(蓋版), 그리고 그 위에 심어진 뾰족한 철침으로 왜군들이 감히 돌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100% 메이드 인 코리아’다. 이 거북선을 창제한 이순신, 세 글자는 자신보다 수천 년을 더 살 이름으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16세기의 ‘조선(造船) DNA’가 우리 몸에 전해진 탓일까. ‘씨도둑은 못한다’는 옛말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은 뛰어난 설계·건조능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으로 우뚝 섰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침체를 거듭하던 조선업계에 모처럼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세계 조선 수주량은 3022만CGT(수정환산 t수)로 전년 동기 대비 62.6%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내 조선소의 수주량은 1087만CGT로 지난해보다 88.7% 늘었고, 세계 시장점유율도 지난해보다 5%포인트 높아진 36%를 기록했다.

 이를 방증하듯 미국의 정유 운반 전문선사인 스콜피오탱커스(Scorpio Tankers Inc.)는 지난해 8월 이후 국내 조선소에 무려 61척의 배를 주문했다. 이 회사의 사장인 로버트 벅비는 한국 조선소의 최고 경쟁력으로 ▶납기 준수 ▶고연비 선박 제작능력 ▶근로자의 혁신을 꼽았다. 그는 “한국의 조선소는 단순히 선주의 요청대로 배를 만들지 않고 제작현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매번 성능이 향상된 선박을 만들어 준다”며 “이게 바로 선주들이 배 값이 비싸도 한국 조선소를 고집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렇듯 최근의 선박 수주 증가는 종전과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세계 물동량 증가에 따른 해운경기 회복 효과로 선박 발주가 늘어나던 통상의 사이클과 달리 해운시장은 여전히 불황인데도 선박 수주가 증가한 것이다. 이 배경에는 앞서 언급한 스콜피오탱커스의 경우처럼 정유제품 운반선이나 대형 컨테이너선 등 상선 위주의 고연비·친환경 선박 수주 증가가 자리 잡고 있다. 해운업 침체로 저운임 상태가 지속되면서 해운사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연비가 개선된 선박 발주를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 활기를 띠는 국내 조선소의 경쟁력을 이어 가기 위해선 반드시 ‘선박수출금융’이 뒷받침돼야 한다. 통상 해운사들은 선박을 발주할 때 선박가치의 70~80%에 해당하는 자금을 외부에서 빌려 조달한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된 자금원이던 유럽계 은행들이 선박금융을 대폭 축소한 데 이어 전 세계적으로 금융규제가 강화됐다. 해운사들이 공적수출신용기관(ECA)으로부터 차입을 늘리고, 자본시장에서 직접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 조달을 확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국내 조선업은 외국 상업은행의 차관으로 태동했다.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백사장 사진과 거북선 그림이 인쇄된 500원권 지폐를 손에 들고 영국으로 건너가면서다.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에서 조선소 건설자금과 선박 2척의 건조자금을 대출받은 게 오늘날 세계 1위 조선 강국인 우리나라의 모태가 된 것이다. ▶지역균형 발전 ▶고용 창출 ▶연관 산업 파급 효과와 같은 조선업의 성장을 기반으로 4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8위의 무역강국으로 변모했다. 이제 선박금융 지원 여력을 확충하고 국내외 유동성을 우리 조선업에 적극 활용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 강국 코리아를 이어 나가야 한다. 수출입은행도 세계 최초로 해운사가 발행하는 선박채권에 보증을 더해 국내외 자본시장 유동성을 선박금융에 활용하고 있다.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신은 죽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당시 해전을 피하려는 조정에 이런 내용의 장계를 보냈다. 그의 장담처럼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도 왜선 133척을 상대로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울돌목의 험한 지형과 급한 물살을 염두에 두고 미리 전쟁을 대비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400여 년 전 창조적 아이디어 하나가 위기에 빠진 조선(朝鮮)을 구한 것이다. 이젠 선박수출금융으로 조선(造船)을 구할 창조적 묘수를 찾아야 할 때다.

김용환 수출입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