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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낙동강아 잘있거라(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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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군의 북상>(하)
괴뢰군이 38선을 넘어 낙동강 교두보 일대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하기까지는 약 한 달이 걸렸다. 즉 수도서울은 3일만에, 대전은 20일만에 각각 점령했지만 그들이 낙동강에 남침, 13개 사단을 집결하는데는 대체로 한 달을 끌었다.
그런데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8군의 총반격으로 남침한 북괴군을 38이남으로부터 몰아내는데는 불과 10일이 소요됐다. 남침 초 때의 국군의 분산후퇴 「템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괴뢰군의 붕괴와 궤주는 빨랐다. 여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교훈은 독재체제하의 군대란 일단 지휘통솔이 무너지면 급속히 와해된다는 사실이다.
이점은 종전당시의 독일의 「히틀러」군대나 태평양전쟁 때 「버마」의 「인파르」작전 당시의 일본군 궤주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럼 다시 전회에 이어 중·동부전선에서의 괴뢰군 패주상황을 당시의 국군 제l, 제3, 제8, 제6사단 관계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비 멈춰달라고 불공도>
김동빈씨(당시 1사단11연대장=대령·예비역육군중장·현재 향군인회사무총장·48) 『9월 초에 우리 11연대는 낙동리·해평전투를 마치고 다부동에 투입됐습니다. 대구의 전략적 관문인 유학산파 팔공산을 잇는 다부동에서는 매일 혈전이 벌어졌고 유학산은 13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어요. 나중에 유학산을 점령하고 올라가니까 시체가 덮여있어 앉아서 밥 먹을 자리가 없을 정도입디다.
그후 영천전투를 치르고 불로동에 집결하여 2천명의 신병보충을 받고 이들에게 사격훈련을 시키고 있을 때 총반격명령이 왔어요.
9월16일에 파계시에 연대본부를 두고 반격준비를 하고 있는데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요. 미군 고문 「해리스」대위와 상의해서 파계시 승려에게 1천환을 주고 비가 개도록 염불을 드려달라고 했어요.
이날 저녁에 효령에 있는 적13사단사령부를 기습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차량 40대를 노획해서 북진 때 잘 사용했어요.
17일 밤에는 가산의 적 후방고지를 야간 공격했어요. 이때 우리 수색대가 적독전반장교 9명을 잡아왔어요. 정보를 다 캐내고는 몇 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냈지요. 후방에 아군이 들어왔다는 것을 적에게 알려 위협과 공포감을 주려는 거지요. 이튿날 아침에 보니까 적이 모두 후퇴해 버립디다. 이렇게 해서 청생산고지는 무난히 탈환했어요. 얼마 안 있다가 미제1기병사단이 들어오는데 사단장 「허버트·R·게이」소장이 엽총을 들고 「탱크」에 앉아 선두로 들어오더군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그 다음부터는 달음박질 하다시피해서 북상했습니다.
길가에는 적의 패잔병 행렬이 늘어져 있어요. 무기만 회수하고 그냥 내버려두었어요. 후속부대가 수용하리라고 생각한 거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패잔병들을 다 조치하지 않고 지나간게 큰 실수였어요. 이들 대부분은 태백산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됐다가 1·4후퇴 때에는 도로 나와 아군에게 큰 압력을 주었거든요. 조치원에 올라와 여관에 연대본부를 두고 하룻밤을 자고 막 대문을 나서는데 내가 앉았던 마루에 수류탄이 날아와 터져요. 적「게릴라」가 던진 거예요. 몇 초 차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3대대장 이무중 소령은 조치원서 괴산으로 가던 중 적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어요. 이런 산발적인 저항은 있었지만 진격은 쾌속이었습니다.』

<뺏은 적 트럭 타고 북진>
김종순씨(당시 3사단23연대장=중령·예비역육군소장·현 국방장관 특별보좌관·51) 『우리는 9월15일에 「유엔」군의 인천상륙도 모르고 포항의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거짓말 같지만 이때 형산강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어요. 목까지 닿은 강물을 헤치며 서로 도하하려다 총에 맞아 쓰러지면 그대로 떠나려고 했어요. 19일에야 방송을 듣고 비로소 인천상륙을 알았는데 20일께부터 적세가 갑자기 약화되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우리 연대에는 신병이 많았는데 이들도 이기는 전투니까 무척 용감하더군요. 형산강고지를 점령하는데 어찌나 급습했는지 적은 「탱크」와 「트럭」에 발동을 걸어둔 채 도망쳤어요. 그 「트럭」에 그대로 올라타고 추격했습니다. 북상하면서 내무서를 점령하고 보면 해안초소에 경비 나가 있는 자기네 서원들에게는 미처 알리지도 않고 도망쳐서 우리한테 전화연락이 옵디다. 그러면 우리 부대에서 이북사투리를 잘 쓴 자에게 그 전화를 받게 하여 후퇴령이 내렸으니 어느 장소로 곧 오라고 해놓고 오는 대로 모두 잡기도 했어요.
울진서는 마침 이종찬 사단장이 우리 연대에 시찰 왔을 때인데 해안경비 나간 괴뢰내무서원들한테서 또 전화가 왔어요. 아까 말한 대로 어느 장소로 오라고 했더니 이들이 길을 잘못 들어 사단장이 와 있는 우리 연대본부로 들어왔어요. 영문을 모르는 사단장은 어떻게 해서 대낮에 괴뢰서원이 연대CP에까지 들어오냐고 기합이예요.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웃으십디다.』
이소동씨(당시 3사단22연대 부연대장=중령·현○○사령관=소장·47) 『총반격명령이 내렸을 때 우리 사단은 형산강 남쪽에 있어서 우선 그 강을 도하해야 했습니다. 이 도하에서 적이 발악적으로 버티어서 피해가 많았어요.
그러나 강을 건너고부터는 파죽지세로 적을 추격해 올라가 우리 사단이 38선도 제일 먼저 넘었습니다. 우리 3사단은 하도 진격이 빠르다고 「로키트」사단이란 별명이 붙었어요.』
신동우씨(당시 3사단장보좌관 겸 민사부장·예비역 공군준장·현 경경신문전무·51) 『혈전 끝에 형산강을 건너 영덕에 진격하니까 육본서 이종찬 사단장을 임시 준장으로 진급시켰는데 사단장은 보내온 계급장을 반송하고 진급을 사양합디다. 그래 이유를 물어봤어요. 사단장은 지금 인천상륙과 낙동강 반격을 개시했지만 국군이 1계급 특진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한 계급씩 강등돼야 된다는 거예요.
국군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혼자 후퇴하여 지금 실지를 회복하는 이 마당에 국민 앞에 엄숙히 사죄하고 한 계급씩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숙여집디다. 그런데 육본에서는 임시계급에 불만이 있어 그런 줄 알고 이번에는 정식 회장승진 통지를 보내왔어요. 그래도 사단장은 준장계급장을 안 달고 대령으로 행세했어요. 결국 정일권 참모총장과 강문봉 작전국장이 왔을 때 정총장이 몰래 사단장 작업모에 준장계급장을 달아주고서야 할 수 없이 준장이 된 거예요. 추격해 올라가는 곳마다 애국청년들이 부역자들을 잡아놓고 우리에게 즉결을 호소했지만 사단장 엄명으로 모두 후송, 의법처단케 했습니다.
그리고 길가에 시체가 있으면 모두 묻어주라고 해서 이 일은 내가 맡아하느라고 애먹었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 사단관할지역에서는 사형은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코스모스 화환>
허순오씨(당시 8사단21연대 군수참모=소령·예비역육군준장·현 한전이사·50) 『우리 연대는 9월18일부터 추격을 개시하여 단숨에 군위·의성을 거쳐 안동으로 쳐올라갔어요. 안동에서는 내가 6·25전에 공비토벌 때 세들었던 소주양조장집에 가보았더니 다른 집은 다 탔는데 그 집만은 그대로 남아있습디다. 예천에서는 김용배 연대장이 선두에 서서 들어가다가 적 패전병들이 일제히 다발총을 쏘는 바람에 큰일날 뻔했어요. 25일에 풍기를 탈환했는데 밤중에 적「탱크」소리가 들려와요. 우리는 안동과 영주 사이의 적이 쫓겨오면 기습할 계획으로 미리 105㎜포와 3·5「인치」포를 도로변에 배치해놨다가 일제사격을 가해 적「탱크」10여 대를 한꺼번에 파괴했어요. 아침에 나가보니까 「탱크」에 탔던 적병들은 모두 새카맣게 타 죽었더군요. 다시 북상하여 단양고개 「터널」에 갔더니 객차 세간에 적부상병이 가득 실린 채 버려져 있어요. 벌써 죽은 자도 많았는데 후속부대에 연락해서 모두 안동으로 후송했습니다.
양평에 오니까 부락민들이 「코스모스」로 만든 화환을 목에 걸어주면서 열렬히 환영해주더군요. 양평에서는 적이 후퇴하면서 우익청년 6백50명을 학살했어요. 현장에 가보니 가족들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해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며 적개심이 불타오릅디다. 우리 부대는 10월2일에 미아리에 들어와 북진을 계속했습니다.』

<적 패잔병 방임은 큰 실책>
임부택씨(당시 6사단7연대장=대령·예비역육군소장·현 사업·53) 『신령북방의 화산고지에 있던 우리 연대는 총반격령을 받고 17일부터 돌파작전을 전개했어요. 작명상의 우리 연대 공격목표는 남침 초에 적과 싸웠던 춘천으로 돼 있더군요.
이날 하오 3시쯤 우리 앞의 적고지를 탈환했어요. 이 전투에서 4중대장 김대위가 전사했어요. 19일께부터 우리 연대는 추격전에 들어가 노획한 적차량 40여 대를 기동화해서 탄약·노무자들까지 싣고 쳐올라갔습니다. 중대장들은 모두 적「지프」를 한 대씩 얻어 탔구요. 안동을 거쳐 문경새재를 넘고 9월29일에는 목표지점인 춘천에 들어갔습니다. 이 동안에 큰 저항은 없었어요. 수색대가 먼저 나가 적이 있으면 각대대별로 별도 조직한 타격대를 시켜 섬멸시키고는 주력은 그대로 올라갔습니다.』
김집씨(당시 6사단7연대 3대대 11중대 2등 중사·현 동양방송보도부 편집제작부차장·42) 『추격 때는 우리 중대는 거의 일사천리로 북상했습니다. 수안보로 들어가는 곳에서 적 저항을 받았지만 곧 격파했어요. 그렇게 완강하던 적이 후퇴할 때는 거짓말처럼 무력합디다. 독재국가의 군대가 이길 때는 천하무적인 것 같지만 질 때는 단숨에 무너진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한 셈이지요. 충주채 못 미처 북상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저녁에 거적때기로 만든 변소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누가 등에서 총을 대고 「손들엇」 해요.

<변소에서 패잔병 안나>
나는 짓궂은 전우가 장난하는 줄로만 알고 「야 총 치워라」했어요. 그랬더니 「그러면 살려주겠느냐」는 거예요. 그제서야 이게 적병이구나 생각하고 섬뜩합디다.
「살려준다」고 했더니. 재차 「꼭 살려주겠느냐?」고 되물어요. 「약속한다」했더니 총을 칩디다. 돌아다보니까 분대장급 적병이어서 연대정보대로 데려다가 꼭 살려주라는 부탁과 함께 넘겼어요. 패주하는 군대의 사기란 이 정도예요. 우리가 올라가는 부락마다 주민들이 꽹과리를 요란하게 치며 환영해줍디다. 이듬해 적 패잔병들은 더 얼이 빠져 손들고 나오곤 했어요.』
※알림=한국전쟁 때 괴뢰군에 잡혀 북한포로수용소에서 수용생활을 하다가 휴전 무렵에 송환된 분(상이포로 포함)은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멀지 않아 본 연재에 게재될 『남과 북의 포로수용소』자료를 보완, 확인하기 위한 것이오니 관계제 인사는 부디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 (28)821l(교환)의 74번 야간은 (94)3415(서신으로 연락해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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