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교과서 전쟁터 방불 … 기관 43%, 질의 못 받고 멀뚱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5호 03면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국회 교육체육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이 역사 교과서 검정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국감 첫날부터 파행 또 파행

교육문화체육관광위 국감 96시간 밀착 취재기

“잘해봅시다.”
“이번엔 싸우지 마시죠.”

14일 오전 9시40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16층에 마련된 교육부 국감장에 여야 의원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웃음 띤 얼굴로 서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오전 10시 본회의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보수적 사관으로 논란을 빚어온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 증인석에 오르자 우원식 민주당 의원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포문을 연 것이다.

역사 서술 방향을 놓고 논란을 빚어온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 3명에 대한 증인 채택을 놓고도 여야는 2시간 넘게 옥신각신했다. 참다 못한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이 “증인 순서를 생략하자. 증인이 꼭 필요하신 분은 빼고 내가 먼저 질의하겠다”고 마이크를 잡았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끼어들기 하지 말자”고 반격했다. 국감장이 교과서 전쟁터로 변하면서 이날 피감 기관 7곳 중 4곳에는 질의가 아예 이뤄지지 못했다.

오후 2시30분. 야당 의원들은 갑자기 A4 용지를 꺼내 자신들의 노트북 모니터 뒤에 붙였다. ‘친일독재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 검정 취소’라고 씌어 있었다. 수도권 의원들이 국감 때 지역구 홍보를 위해 모니터 뒤에 ‘OO시는 행복교육도시’라고 쓰인 종이를 붙여온 걸 차용한 전술이었다. 이에 여당 의원들도 20분 뒤 ‘좌편향 왜곡 교과서 검정 취소’라고 쓰인 종이를 붙였다. 신학용 위원장이 “국민들이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은 “정책 국감을 하려 했는데 예상대로 교과서 국감이 됐다. 민생 현안을 제기해도 금방 교과서로 돌아온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민주당 관계자는 “‘모니터 시위’가 언론을 타면서 짭짤한 효과를 봤다. 여당은 정쟁을 부추긴다고 비판하지만 야당으로선 정책 국감만으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지 않냐고 반문 했다.

인사청문회로 변한 국감장
14일 오후.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은 교육부 국감에서 느닷없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겨냥했다. 이 의원은 덜 말린 코다리를 들고 나와 “이렇게 부실한 식재료가 서울시 급식에 쓰 이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어 “공급원인 서울시 친환경유통센터의 배옥병 기획자문위원장은 박 시장과 친분이 있다. 커넥션에 의해 서울시 급식이 운영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두 번째 질의 순서에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출석 대상도 아닌 박 시장을 여당 의원이 때린 건 야권 대선 후보의 한 명인 박 시장의 싹을 자르려는 정치공세”라고 반발했다.

1 증인 채택 설전을 벌이는 여야 간사들. [뉴시스] 2 박원순 시장을 질타하는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 3 곽병선 위원장을 비난하는 야당 의원들. 4 퇴장을 요구받고 있는 일본대사관 직원(왼쪽).

야당 의원들은 거꾸로 박근혜정부 흠집내기에 주력했다. 민주당 정세균 의원은 15일 유진룡 문체부 장관에게 “2017년 부처 재정 목표액이 8조원인데 지금 재정은 5조원밖에 안 된다. 박근혜정부의 공약 부풀리기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박근혜정부 들어 임용된 친박 계열 공공기관장들도 집중포화를 맞았다. 정의당 정진후 의원이 18일 오전 국감에서 “한국장학재단 곽병선 이사장이 내 보좌관에게 ‘질의를 자제해달라’고 전화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오전 11시부터 3시간가량 국감은 중단됐다. 이날 오후엔 민주당 유은혜 의원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배용 원장이 대교협 회장이던 시절에 법인카드 유흥주점 사용, 성과급 지급 부적절 상황이 있었다”고 맹공했다. 결국 이 원장은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은 내 부덕의 소치”라고 유감을 표명했다.

교육부 유관기관인 동북아문화재단의 한 관계자는 “국감장이 아니라 인사청문회에 와있는 기분”이라며 “공공기관장들이 친박 인사란 이유로 사상 검증을 당하고 과거의 개인적 치부를 해명하는 데 국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외발언 놓고도 전쟁
14일 밤. 교육부 국감에서 여당 의원의 혼잣말이 한 차례 전쟁을 불렀다. 민주당 김태년 의원이 서남수 교육부 장관에게 “같은 얘기라도 야당 말이면 부인부터 하는 장관 태도에 문제가 있다”라고 공격하자 새누리당 박창식 의원이 “난리 치시네”라고 혼잣말을 한 게 야당 의원들 귀에 들어갔다. “저런 얘기를 듣고서 같이 회의할 수 없다”(유기홍 의원), “국회 모욕 발언”(유은혜 의원)이라는 질타가 쏟아졌다. 결국 박 의원의 사과로 회의는 가까스로 재개됐다.

국감 나흘째인 18일 밤에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국감장에 나타난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배용 원장에 대해 “자격이 충분한 분”이라고 감싼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을 민주당 유기홍 의원이 정회시간에 찾아와 “교과서 논란을 불 붙인 사람이 무슨 자격이 있나. 공부 좀 하라”며 따진 게 사단이 됐다. 발끈한 강 의원은 “모욕적인 발언에 유감을 표한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유 의원은 “공식 회의 발언이 아니었다”고만 했다. 새누리당 측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대해 사과하라는 것”(김세연 의원), “인격 모독 발언을 여기 의원들이 다 들었는데 왜 회의장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하느냐”(김희정 의원)는 비난을 쏟아냈다. 반면 야당 의원들은 “시간이 늦었다. 회의를 진행하자”고 피해 나갔다. 이 바람에 오후 회의가 파행되며 국감은 이튿날 새벽 1시30분을 넘겨서야 끝났다.

교문위 소속 위원은 30명이다. 국토해양위(31명)에 이어 국회 2위의 상임위 규모다. 게다가 피감 기관이 가장 많아선지 30명 위원이 각기 7분만 질의해도 3시간30분(210분)이 걸린다. 이 때문에 감사 첫주인 14~18일 동안 국감을 받아야 하는 기관 41곳 가운데 질의를 받은 곳은 23곳(56%)에 불과했다. 질의를 받은 기관 가운데 한두 차례만 받은 기관도 8개나 됐다. 질의를 아예 못 받은 18개 기관장(43%)들은 12시간 넘게 자리만 지키다 간 셈이다.

도종환 “준비한 것 30%밖에 소화 못해”
국립국제교육원 관계자는 “정치적 사안이 없어선지 의원들이 질의를 전혀 하지 않고 별도 자료를 내라는 요구도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공공기관 관계자는 “질의를 피하니 솔직히 다행이지만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않고 앉아 있다 보면 여기에 왜 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의원 입장에서도 불만이 많다. “국감 발언시간이 기껏해야 하루에 17분밖에 없다. 이 짧은 시간에 준비한 질문을 하고 답변까지 들어야 한다. 자연히 ‘됐어요! 그만하세요’라며 상대방 대답을 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TV로 이런 장면만 보는 국민들은 ‘호통 좀 그만 치라’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새누리당 박창식 의원)

국정감사 하루 동안 의원은 보통 3차례 정도 질의를 할 수 있다. 1차에 7분, 2차에 5분, 3차에 3~5분을 하고 나면 최장 17분이다. 그러나 교과서 논쟁 등으로 의사일정이 지연되면 1차 질의도 못한 채 오후를 훌쩍 넘긴다. 교과서 논란으로 일정이 지연된 국감 첫날(14일) 발언 순서 마지막 주자였던 유기홍 의원은 국감 개시 7시간30분 만인 오후 5시30분에야 1차 질의를 할 수 있었다.

민주당 도종환 의원은 “시간이 없어 피감 기관 중 30%밖에 건드리지 못했다. 국감 한 달 전부터 의원회관에 야전침대 놓고 숙식을 하며 준비한 자료의 70%를 날려버린 셈”이라며 “피감 기관을 분야별로 나누거나 현안이 있을 때마다 상시적으로 국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학 교수는 “별도의 기간을 정해놓고 국감을 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미국처럼 상시 국정조사로 그때그때 중요한 이슈를 집중 논의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술판은 옛말 … 귀갓길 바쁜 의원들
국감 첫날인 14일 일정이 모두 끝난 시각은 새벽1시였다. 15∼18일 나흘간도 밤 12시15분~새벽 1시30분에야 일정이 끝났다. 체력이 약한 의원들은 3차 질의가 시작되는 밤 10시~11시대에는 충혈된 눈으로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다 질의순서가 되면 국감장에 들어왔다. 15일 3차 질의를 마치자마자 귀갓길에 오른 민주당의 한 여성 의원은 “너무 피곤해서 끝까지 앉아있지 못하겠다. 국감장이 찜통같다. 이렇게 늦게까지 진을 빼니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14일엔 민주당 의원 전원이 끝까지 자리를 지켜 “국감 경력 9년 만에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다 같이 박수치자”(안민석 의원·3선)라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안 의원실의 관계자는 “과거 국감 땐 여야 의원들이 함께 술도 마셨다지만 요즘은 피감 기관이 워낙 많아져 자정을 넘겨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곧바로 귀가하는 분위기가 대세”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도 “술대접한다는 건 옛말이며 사회가 투명해진 탓인지 국감장에 피자 한 판 돌리는 일도 드물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