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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간서 아이 낳는 10대 소녀들 … 짠한 풍경 잊혀지지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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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5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소설가 신경숙(50)은 녹음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 했다. 쓴 작품과 관련된 거라 생각했는데 유니세프 캠페인 영상의 녹음이었단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 자격으로 방문한 네팔에서의 모습과 직접 녹음한 내레이션이 실린다고 했다.

 신경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직접 전하는 유니세프 영상이라니 독특하겠단 느낌이다.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씨는 “작품과 관련된 일 말고 이렇게 이름을 내걸고 활동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곤 녹음이 잘 됐는지 걱정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지난달 26일 소설가 신경숙이 네팔 줌라 지역 라랄리히 마을 기안쿤자 초등학교에서 영유아반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아이 두 명이 책상도 없이 바닥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문덕관 여성중앙 사진기자]

 그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를 맡은 건 지난해 6월이었다. 존경하는 고 박완서 작가가 생전 18년간 친선대사를 했는데 그 뒤를 이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지난 9월 23일부터 7박8일간의 일정으로 네팔에 다녀오기도 했다. 네팔인도 잘 모른다는 네팔 오지였다. 유니세프 관련 방송 출연도 한다. SBS ‘힐링캠프’에 조만간 나올 예정이란다. 주로 작품 활동으로만 대중을 만났던 작가의 생소해 보이는 일상이다.

 “네팔의 어려운 아이들을 보고 적극적으로 친선대사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삶을 돌보는 일이니 소설을 쓰는 일의 연장이란 생각이 절실히 들었어요. 사람 때문에 헤어날 길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지지만 손을 내밀어서 발걸음을 떼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역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내년이면 어느 새 등단 30년째다. 스물두 살 때이던 1985년 등단했다. 존재의 내면을 섬세하게 엮어왔던 작가라는 평가를 받던 그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인기를 끈 2011년 이후 해외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작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날 인터뷰를 통해 그가 끊임없이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경숙의 네팔 봉사 동행 르포기사는 ‘여성중앙’ 11월호에도 특집기사로 실린다.

 - 그간 작품 집필 외에 다른 사회활동 모습은 많이 드러내지 않았다.

 “40대 중반을 지나면서 작가로서 나의 상황을 깊숙이 살펴봤다. 언젠가 조금 더 여유가 생기고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면 글쓰기와 함께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차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선배 작가 박완서 선생님이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 영향인지 친선대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선뜻 응했다. 유니세프의 일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뜻이 맞다. 그동안 드러내고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이름을 건 것은 처음이다.”

 - 지난달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네팔에 갔다 왔다.

 “유니세프를 통해서 더 큰, 미처 보지 못했던 큰 세상을 보게 됐다. 사실 지난해 해외 일정이 많아 진작 했어야 할 일을 못했던 거다. 내가 친선대사를 맡은 건 지난해 6월이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지난해부터 ‘Schools for Asia(스쿨스 포 아시아)’ 캠페인을 진행한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시아 국가 어린이들을 우리나라 유니세프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독일과 핀란드 유니세프 국가위원회가 네팔 학교들을 지원했는데 내년에 끝난다. 대신 우리가 지원을 하게 된다. 지원하기 전 네팔에 미리 가본 것이다.”

함께 축구를 하는 신씨. [문덕관 여성중앙 사진기자]

 - 어떤 걸 봤나.

 “네팔 사람들도 물어보면 잘 모른다는 오지인 줌라 지역 라랄리히 마을, 네팔 군즈 지역에 갔다. 그들이 사는 집에서 지내며 같은 음식을 먹었다. 상황이 너무 열악했다. 책을 보는 아이들보다 철공소 같은 데서 일하거나 자기 몸집보다 훨씬 많은 나뭇단을 지고 내려오는 어린이들이 더 많이 보였다. 이곳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생리가 시작되는 어린 여성들은 움막으로 보낸다. 직접 가보니 외양간 같은 곳이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을 때도 마찬가지다. 생리나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일이 부정한 일인 거다. ”

이동 중 만난 여자 아이들. 몸집보다 큰 나뭇단(우측)을 나르고 있다. [문덕관 여성중앙 사진기자]

 - 기억에 남은 아이들이 많을 것 같다.

“27일 라랄리히 마을에서 스무 살 된 한 여자 아이를 만났다. 내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어린아이고 정말 예뻤다. 그 아이는 열세 살에 카스트(신분제도)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다. 열다섯에 첫 아이를 낳았지만 카스트가 낮아서 집에서 내쫓겼다. 그러곤 갈 데가 없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친정에서도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있어서 여동생하고도 헤어진 상태였다. 그 아이가 있던 곳은 유니세프가 만든 가정폭력 피해여성 임시쉼터였는데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물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랑 만난 거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울더라. 나도 눈물이 났다.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어린애 입에서 ‘나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그러곤 자기 아이가 지금 다섯 살인데 카트만두 로 가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하더라. ‘너는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어보니 그제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처음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내가 스무 살 무렵 고생했던 생각도 났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아이를 도왔다.”

 - 네팔 봉사가 작가에게 남긴 게 있나.

 “가기 전엔 관념적으로 유니세프가 좋은 일을 하고 있겠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갔다. 사실 ‘방송까지 나와야 할까’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열악한 모습을 보고 오니까 적극적으로 친선대사 일을 해야겠다고 내가 변했다. 유니세프에서 나를 교육시킨 셈이다. 세상엔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인간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힘을 믿는다. 그곳 학교를 가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담벼락에 낙서를 하는 등 생활은 다 똑같다. 아이들의 얼굴에 피어있는 미소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아이들하고 놀게 되더라.”

 - 그럼 이제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건가.

 “그렇지는 않을 거다(웃음).”

 - 유니세프 일도 하는데 앞으로 다큐 출연 등으로 더 자주 등장하면 좋을 것 같다.

 “여태껏 작품 외적인 것으로 방송에 출연하거나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TV에 출연할 때도 문학 프로그램만 나갔다.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가 작품 외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다. 그런 기준 같은 게 있었다.”

 - 작품 외의 발언엔 너무 신중했던 것 아닌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일 때의 말엔 파급력이 있다. 항상 조심스러웠고,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다. 특히 어떤 정치 사안 등에 대해서는 일부러 의도적으로 피해온 것도 있곤 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말은 내 방식대로 했다. 작가는 글 쓰는 게 행동이지 않나.”

 - 작품 이야기를 묻고 싶다. 『엄마를 부탁해』 인기로 최근 몇 년간은 바빴다.

 “지금은 나한텐 집필하는 시기다. 분주한 때도 있었다. 분에 넘치게 사랑을 받은 『엄마를 부탁해』가 자꾸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시기였다. 다행히 페이스를 잘 조절했던 것 같다. 작품도 못 쓰고 휘둘렸으면 지금쯤 속이 많이 상했을 거다. 『엄마를 부탁해』가 첫 작품이었으면 담담하게 못 지냈을 거란 생각도 했다.”

 - 네팔 일도 작품이 될 수 있는 건가.

 “작가가 머물렀던 공간과 봤던 풍경은 작품 속의 공간과 풍경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그게 내 안에 있다가 글쓰기라는 어떤 것을 통해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로 나올 수도 있을 거다. ”

 - 트위터, 페이스북은 안 하나.

 “유행이나 속도에 관련된 일은 한 삼 년쯤 늦다. 새 옷을 사놓고 삼 년 뒤 입을 때도 있다. 삼 년쯤 지나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다’라는 판단이 서는데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내 힘에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해나가는 분들이 존경스럽다.”

 - 노벨문학상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언어 문제가 크다. 작품이 번역이 돼서 해외로 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게 더 시급하고 노벨상은 다음 문제인 듯하다. 그러곤 자기 일 하다가 수상 소식이 오면 거절도 할 수 있는 거고 받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나(웃음).”

 - 작가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나는 작가가 특이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 자신이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성장한 평범한 사람이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글 쓰는 일뿐이라서 작가가 됐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세상과 내 삶에 대한 내 행동이고,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쓰지 않는 것이 작가로서 내 발언이다. 누가 봐도 옳고 바른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뒤집어 생각하고 회의하고 또 회의해 보는 일이 작가로서 나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름답다’고 쓰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엄마가 필요한 엄마까지도 끌어안아주는 큰어머니의 역할이 내겐 소설쓰기다.”

글=이상화 기자
사진=문덕관 여성중앙 사진기자

작가 신경숙 네팔에서의 7박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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