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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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 표라고 소홀히 할 것은 아니다. 1875년 프랑스에서는 왕정 복고운동이 한창이었다. 이때국민의회에서는 제3공화국 헌법이 한 표의 차로 통과되었다. 만일에 공화 파에서 한 사람이 기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 한 표로 공화정이 살아난 셈이 됐던 것이다.
투표 때 기권하는 것은 주로 내 한 표쯤으로는 대세가 뒤바뀌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한두 표가 모여서 역사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1930년만 해도 히틀러를 지지하는 민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때의 여론조사로는 히틀러 지지가 10%였고 반대가 15%였다. 나머지 75%가 이른바 부동표였다.
보통의 경우 우유부단과 무정견, 그리고 비판력의 부족이 부동표를 만들어낸다. 그러면서도 부동표처럼 두렵고 엄청난 의미를 가진 것은 없다. 특히 민주주의가 불건강한 때에는 의견의 질보다도 양이 더 지배력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실지로 히틀러를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도 사실은 이 부동표였다. 부동표의 태반은 히틀러의 마술에 마취되었던 것이고, 그 나머지는 선거때마다 기권하는 그런 표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반대세력도 그나마 기권하였다. 그들로는 그 엄청난 물결을 막을 길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권리의 포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인권의 포기였고, 자유의 향수를 위한 권리의 포기이기도 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실망 또는 마비현상 때문에도 투표권의 포기가 성행한다. 누가 정치를 하나 마찬가지라는 의식이 이런 때에는 곧잘 작용한다.
2차대전 후의 프랑스의 정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 원인중의 하나는 너무나도 많은 기권 표에도 있었다. 46년 10월의 국민투표 때에도 총 투표수의 절반이 되는 8백만 표의 기권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투표율만 높다고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공산권 내에서의 투표율은 대개 90%이상이 된다.
여기 비겨 서구에서는 투표율이 70%를 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 형편이다.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으려면 그만한 여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가 된다.
27일은 대통령 선거의 날, 이날 포기되는 한 표의 값은 그것을 다음 세대가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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