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맛깔스런 '김치 우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2001년 2월 어느 토요일 오후.

여느 때처럼 집에서 쉬고 있는데 미국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스의 맹일영(孟一泳.61) 한국지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회원으로서 친하게 지내온 만큼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저녁 6시쯤 도착한 孟사장의 손에는 그가 직접 요리한 김치찌개가 들려져 있었다. 일종의 깜짝 파티였다. 곧이어 세 종류의 김치찌개가 식탁에 올라왔다. 삼겹살 김치찌개, 멸치 김치찌개, 삼겹살과 멸치가 모두 들어간 김치찌개 등.

孟사장이 직접 음식을 들고 서울 부암동 자택에서 우리 집이 있는 한남동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국 땅에서 나를 이렇게 끔찍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니. 한국이 내게 성큼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 소주잔을 나누며 맛있게 먹었던 김치찌개는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찌개 중 단연 최고였다. 그 맛에 감동해 난 요즘도 매주 세 번 집에서 김치찌개를 먹는다. 孟사장과 나는 김치로 인연이 맺어진 듯 싶다. 어찌 보면 '김치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00년 6월 내가 한국P&G 사장으로 왔을 당시에는 이 곳의 문화가 무척 낯설었다. 당시 주한미상공회의소 부회장이었던 孟사장은 한국인들의 김치 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스터 라즈와니, 한국인에게 김치는 매우 특별한 음식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김치를 먹으면 집에 온 것처럼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갖게 되지요. 김치가 빠진 식탁은 한국인의 식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예요."

식품공학박사이기도 한 그는 "김치에는 비타민이 많다"며 "특히 발효식품이라 암을 예방하는 효과도 크다"고 김치의 효능을 강조했다.

孟사장의 이런 조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한국P&G는 2000년 가을부터 매년 한번씩 '사랑의 김치 만들기' 행사를 열고 있다. 한국에 사는 1백여명의 외국 대사.기업인들을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으로 초청해 김치를 직접 만들게 하는 일종의 자선 행사다.

참가자 모두가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배추와 양념을 버무리면서 한국 문화를 체험한다. 이렇게 만든 김치는 고아원.양로원 등 복지시설에 기증된다.

평소 孟사장은 내가 한국에서 겪는 문화적 갈등을 극복토록 하기 위해 한국음식 맛보기에 도전할 것을 제안하면서 나를 인사동 전통 음식점에 자주 초대했다.

함께 먹었던 음식 중에 청국장과 닭갈비도 별미였다. 처음에는 특유의 냄새가 고약했지만 한번 먹어본 후에는 숟가락을 놓을 수 없었다. 난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인도요리 식당에 초대, 인도 빵 '난'과 '탄두리 치킨'을 대접했다.

난 요즘도 아내와 주말마다 닭갈비를 먹으러 서울 강남을 찾는다. 매운 것을 좋아해 닭갈비에 매운 고추를 썰어 넣어 달라고 종업원에게 특별히 부탁까지 한다.

소주와 백세주를 섞은 오십세주도 잊지 않고 주문한다. 한 달에 한두번씩 전국 주요 도시 맛집에서 보신탕.선지해장국.갈치조림 등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의 孟사장은 점잖은 신사지만 한국음식을 먹을 때면 어린 시절 개구쟁이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라즈와니,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구두쇠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한 번은 우연히 이발소에 갔는데 그 할아버지가 면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깍쟁이''구두쇠'라고 놀렸어요. 옆에서 간지럼도 태우고. 그러곤 혼날까봐 냅다 줄행랑을 쳤죠. 그 할아버지는 쫓아오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더라고요."

나의 증조부는 인도에서 탄자니아로 건너간 이민 1세대다. 아버지는 내가 10대 후반이었을 때 탄자니아에서 캐나다로 이주했다. 난 대학을 캐나다에서 마쳤고, 지금은 미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본 여러 나라 가운데 한국을 특히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孟사장처럼 편안한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재식 기자

<프로필>

◇앨 라즈와니(45)

▶1958년:탄자니아 출생
▶81년:캐나다 캘거리대 화학공학과 졸업
▶98년:P&G 미국 본사 마케팅본부장
▶99년:대만P&G 사장
▶2000년~현재:한국 P&G 사장

◇맹일영(61)

▶1972년:미 위스콘신대 식품공학.생화학 박사
▶76~80년:미국 제너럴푸드 수석연구원
▶80~82년:미 농무부 국장
▶92년~현재:미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스 한국지사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