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외교 주역으로 활약|장비현대화계기도 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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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파월 6년만에「따이한」은 월남에서 철군의 닻을 올린다. 23일부터 열릴「워싱턴」참전국 외상회의에. 가는 최규하 외무장관은『1개 전투사단의 1단계 철수』를 공표 했는데 시기는 10월에 있을 월남 대통령선거직후, 규모는 파월 최고참 전투사단인 맹호부대가 빠져 5만주 월군의 3분의1을 감축할 것으로 풀이된다. 우러나라 역사상 첫 해외원 정군으로 월남에 파병한 것은 65년9월 청룡부대(해병여단)가 선발대였다. 그밖에 맹호와 백마사단이. 그리고 이동 욋과 병원·비둘기부대·백구부대(해군)·은마 부대(공군)가 가서 주월 사령부가 생긴지 6년 동안 한국군은 미군 다음가는 큰 규모의 연합군으로 공산화의 위기에 빠졌던 월남을 구출하는데 공헌했다. 65년 파병당시의 명분은 6·25때 우리가 우방으로부터 받은 원조에 대한 보은의 정군으로 곤경에 빠진 월남과 미국을 지원하는데 있었다.
월남에 못지 않은 남북 긴장상태에 있는 한국으로서 병력을 빼어 보낸다는 것이 큰 모험이었지만 월남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길이라는 두 전선의 함수관계로 파월의 성과는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이다. 파월의 댓가로 군원이 관이 멎는 동안 국군장비현대화는 박차를 가했고 약10억「달러」의「베트남」특수를 거둬들였을 뿐 아니라(「사이밍턴」청문록) 평화십자군의 활약상을 배경으로「아시아」외교의 주역으로 등장, 국력을 떨친 것은 우리가 얻은 것이었다. 특히 이세호 사령관의 귀국 담에서도 엿보였지만 25만 명의 장병들이 월남에서 참전 경험을 쌓아 6·25때 소대장(육사8기생) 이장성급이 된 오늘 20년 뒤에 장성이 될 실전경험 소대장을 월남전에서 길렀다는 것은 값비싼 자산이며 대 공방 위에 있어 전투요원과 예비군요원 확보를 가능케 했다. 국내에서는 장비사용 제약 등으로 만족할 만한 훈련이 어려운 처지에 월남에서 각종 신장 비와 탄약을 유감없이 사용, 연합군과의 협동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술연마에도 귀중한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파병에 따르는 기술자 파월로 용역군납과 기술자 송금 외에 6년간의 월남경기의 20%에 해당하는 장병들의 외화획득(?)만 1억4천2백여만「달러」(그중 86%를 국내송금) l.14%인 2천1백만「달러」를 현지에서 쓴 셈이다. 6년 동안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8억「달러」어치의 보급품(54개 품목)을 사용했는데 그중 37개 품목에 달하는 약9백만「달러」어치의 초과장비와 5만여t의 잉여물자(1천3백90만「달러」어치)를 국내로 들여와 국군장비현대화에도 한몫을 했다.
약3만여명의 공산군을 사살하여 10대1의 높은 사살 율을 남기고 근3천여명의 전사자와 5천여명의 부상자를 낸 우리 국군의 피의 댓가를 경제적 계수로 어림할 수는 없지만 순수한 송금형식의 외화취득이 전부였으므로 감군과 이에 따른 기술자철수로 이 같은 외화 가득 액이 급격이 내려갈 것이 예상되어 종전후의 월남복구사업의 참여와 새로운 지속적 활로를 찾는데 정부는 빠른 손을 써야할 듯 하다. 더구나 16세기「스페인」의 고대「잉카」제국정복이후의 전리품인 금·은이 퍼진 뒤 전「유럽」에「인플레」와 사치풍조를 일으켰듯이 우리 나라에도 파월 경기로 인한 소비 「패턴」이 말초적으로 자극되어「카메라」와 「테이프·레코더」와 냉장고로 상징되는 내구소비재의 「붐」이 부쩍 일었음을 잊을 수 없다.『왕년에 월남 안 갔다 와봤나』라는 유행어가 생겼을 이만큼 6년 동안 「사이공」에 들른 순수한 방문객만 9천여명-. 연평균 1천8백명으로 본다면 하루평균8명 꼴의 「따이한」이「탄손누트」공항에 발을 디딘 셈이다. VIP다. 위문단이다 하는 방문객이 뻔질 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박 대통령의 단계적 철수검토 발표이후 철군준비가 시작되어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고 이세호 사령관은 말하고 있지만『보낼 때보다 뺄 때가 더 어렵다』는 말처럼 주월 국군은 현재「민사심리전위원회(위원장 이건영 부사령관)다,「재산정리의 해」다, 갖가지 떠날 채비가 부산하다. 배타심이 강한 월남 민족이어서 월남화 계획에 따른 월남군의. 전력증강이 이루어지기가 바쁘게 사소한 일로 「따이한」굴러가라는 학생「데모」가 일기 시작했음은 월남전이 군사적 대결보다 정치심리전으로 변질되어 염전 사상이 폭발 점에 이르렀음을 일러주는 것으로 주월군 일부 철수시기는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때마침 국내에선 주한미군7사단이 한국을 뜸으로써 1백55마일 휴전선을 휴전 후 처음으로 국군이 전담하게되고 M-16공장건설을 깃점으로 군수산업의 계열화·국군 통합화 모색 등 창군 이래의 거센 변혁 속에 자주국방에의 발돋움이 한창인데 주월군 1개 사단철수는 국군병력「실링」재조정 등 벅찬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파월6년에「어글리·코리언」(추한 한국인들)도 많았음을 반성하면서 작전 면서 거둔 피어린 전공과 함께 국군이 건설해준 2천5백 채의 집과 학교와 건물들, 그리고 3만여명의 태권 가족 배출 등「따이한」이 뿌린 진정한 평화의 씨앗은 이제부터 꽃피어야 참다운 파월의 성과가 결실로 거둬진다 할 것이다.

<최규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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