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에 혹해서 … 대포폰 명의 빌려줬다 10배 벌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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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11년 9월 대학생 홍모(25)씨는 한 전단에서 ‘이동전화를 개통해서 보내주면 대당 10만원을 주겠다’는 광고를 접했다. 돈이 궁했던 홍씨는 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신용카드 번호를 알려줬다. 자신 명의의 휴대전화를 받은 홍씨는 다시 퀵서비스를 이용해 통화 상대방이 말하는 주소로 보낸 뒤 계좌로 10만원을 입금받았다. 그는 ‘범죄에 사용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졌다. 이는 결국 현실이 됐다. 1년 뒤 홍씨는 대전지검 서산지청으로부터 “당신 명의의 휴대전화가 보이스피싱에 사용됐으니 조사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홍씨 명의로 개통된 휴대전화는 ‘대포폰’(타인 명의로 불법 개설한 휴대전화)이 돼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된 것이다. 서산지청은 지난해 홍씨를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서울북부지법에서 진행된 1, 2심의 판결은 엇갈렸다. 지난 1월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5월)에서는 유죄 판결이 나왔다. 쟁점은 ‘전기통신사업법 제30조’에서 규정한 위법의 범위였다. 이 조항은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다른 사람에게 통신용으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1심 재판을 담당한 서울북부지법 형사4단독 오원찬 판사는 이 법 30조가 1962년 전기통신법으로 제정될 당시 ‘사설 전화국’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선통신인 휴대전화에는 적용하기 힘들다고 해석했다. 오 판사는 “조항을 만들 당시 무선통신가입자의 명의대여를 제한하거나 휴대전화기 양도 금지를 규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법의 해석상 한계 때문에 지난 18대 국회에서 민주당 강기정 의원은 대포폰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이동통신기기의 부정이용 방지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처리되지 못하고 회기를 넘겼다. 지난해 8월 19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돼 현재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에 계류 중이다.

 그러나 2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을 진행한 서울북부지법 형사2부(부장 강성국)는 원심을 깨고 홍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휴대전화를 개설해 넘긴 행위도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한 것에 해당한다”고 결론 냈다. 해당 법은 유선통신이 유일한 통신서비스였던 60년대에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무선통신기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엇갈린 판단은 최근 대법원의 판결로 종결됐다. 대법원은 홍씨에 대해 벌금 100만원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16일 밝혔다. 대포폰 개설에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현복 대법원 홍보심의관은 “단순히 대포폰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판단에 따라 그간 처벌규정이 모호해 처벌받지 않았던 대포폰 명의 대여자도 처벌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포폰은 보이스피싱과 대출사기 등 다양한 경제범죄의 ‘숙주’ 역할을 해왔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대포폰을 사용하면서 검경의 추적을 피해왔다. 사기범들은 대포폰만 바꾼 채 같은 방식의 범행을 이어갔다. 경찰청과 금융감독원은 올 들어 8월까지 3173건의 보이스피싱에 대포폰이 사용됐고 피해액은 32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렸던 2011년에는 확인된 것만 8244건에 1019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정종문 기자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전화로 공공기관 등을 사칭해 피해자를 속인 뒤 금융거래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알아내 돈을 가로채는 사기범죄. 사기범들은 수사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를 빌린 ‘대포폰’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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