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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두 전경련 前부회장 인터뷰 원문]

중앙일보

입력

1959년 가을께였다.지난 2월20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서 물러난 손병두(62)전경련 고문은 당시 재수생이었다.경복고를 졸업하고 카톨릭 의대에 합격했지만,등록할 돈이 없어서였다.한때 가난을 원망하기도 했지만,마음을 다잡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공을 바꿔 새로 대입시험을 치려고 했다.그러나 서울에서 하숙할 돈이 없었다.집이 경남 진양에 있는 데다 고교 시절 부친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이다.우여곡절 끝에 어느 하숙집 주인으로부터 하숙생 5명을 모아오면 공짜로 하숙시켜주겠다는 말을 듣고,친구들을 설득해 하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몇달 뒤 그는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

孫고문의 '성취욕'은 이처럼 대단하다.쉽게 포기하거나 중도에 물러서지 않는다.삼성에서 이사로 근무하던 83년,42세의 한창 나이에 갑작스레 회사에서 쫓겨났을 때도 그는 마찬가지였다.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부인은 한국에 남아 빵집을 운영하며 뒷바라지했다.아서 D 리틀(ADL)대학원에서 남들은 대개 2년 걸리는 경영학 석사(MBA)과정을 1년 만에 끝내고 돌아왔다.85년 한국생산성본부 상무로 재출발했고,그로부터 12년 뒤인 97년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올라선 데는 이때의 '공부'덕이 컸다.孫고문은 이후 6년간을 부회장으로 지냈다.10년간 부회장을 했던 김입삼 전 전경련 고문 말고는 최장수다.

그런 그가 지난달 11일 갑작스레 사의를 표명했다.며칠 앞선 7일 손길승 SK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취임할 때 그도 유임됐던 터다.그런데도 그는 당시 그는 '자의'라고 극구 강조했다.과연 그럴까."나도 얘기를 듣는 곳이 많아요.쭉 들어보니 필링이 와요.그래서 孫회장에게 그만둔다고 했어요."

'타의'라는 뉘앙스가 강한 말이었다.새정부 때문에 그런 필링이 들었느냐고 물었지만,그는 입을 다물었다.이뿐 아니었다.그는 인터뷰 내내 '정말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당당하게 새정부에 할 말을 했다.새정부의 '대기업과 재벌 구분론'은 비현실적이며,출자총액제한제와 집단소송제는 문제가 많은 정책이라고 밝혔다.그룹 구조조정본부 해체와 관련해서도 그는 어느 조직이든 구조본과 같은 스태프기구는 필요하다고 했다.그랬던 그가 며칠새 이렇게 조심스러워졌다.

인터뷰는 사의를 표명한 지난달 11일부터 서울 대치동 자택과 전경련 사무실 등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孫회장이 취임하면서 '정부와 협력'을 강조하고,집단소송제등의 도입에 원칙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전경련이 비판 기능을 잃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孫회장과 나는 친한 친구지만,그렇다고 생각까지 같을 순 없어요.'한 발 후퇴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요.그러나 기업 스스로 개혁하자거나,사랑받는 기업이 되자는 등의 주장은 전경련이 그동안 추구해왔던 방향이기도 합니다."

-孫회장은 전경련 회장이 되기 전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출자총액규제의 부활이라든가 집단소송제의 도입에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했던 사람입니다.최근의 행보는 그의 신념이 바뀐 것입니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는 97년 2월에 취임해 지난달 20일 물러났다.DJ정부 임기와 비슷하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뵈었어요.'대통령께서 물러나니까 저도 그만둡니다'라고 하니,빙그레 웃으시더군요.참 수줍음이 많은 분이에요."

-김대중 전대통령과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정이 많아요.그리고 사업을 했기 때문인지 기업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시장이 무엇인지를 알아요.그래서 얘기가 통하는 면이 많았어요.게다가 외환위기 이후 재벌 개혁과 기업구조조정이 한창이라 전경련 부회장으로서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던 때,현정부와 충돌도 많이 했어요.그러느라 정이 많이 든 것 같아요."

98년 7월14일이었다.DJ가 재벌그룹 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정.재계 간담회를 하던 중이었다.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은 둘째딸의 결혼식 날이었다.그렇다고 간담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어 연신 시계만 보다가,어쩔 수 없이 포기하려던 참이었다.이 무렵 대통령이 불러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말했다.시간은 30분밖에 안남았고,결혼식은 강남에서 하는지라 제 시각에 도착하기는 불가능했다.그 때 대통령이 경호를 붙여줬다.경찰 오토바이가 앞에서 달리며,길을 뚫어주어 제 시간에 도착,딸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빅딜(대규모 사업구조조정)을 추진할 때 '정부의 대리인'이란 비판도 들었지요? 전경련 부회장이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땐 빅딜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과잉설비를 없애거나 분리.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해야 했습니다.그런데 정부는 당시 재계를 의심했어요.진짜 빅딜을 하려는 것인지,컨소시엄을 만든다고 하는데 속임수는 아닌지 등 온갖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어요.왜냐하면 빅딜을 해야 한다,그리고 언제까지 하라는 것은 정부가 강제한 것이지만 업종을 선정한다든가,지배주주를 누구로 한다든가 하는 나머지 문제는 반도체를 제외하곤 모두 재계 자율이었어요.정부가 개입을 하지 않아 잘 몰랐기 때문에 의심한 것이죠.다만 반도체는 자율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아요.당초 현대전자와 LG반도체끼리는 50%씩 동업하기로 합의했지만,청와대에서 어느 한쪽으로 몰아줘야 한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어요.또 우리 보고 누구에게 주면 좋은지 의견을 내라고 그랬어요.그래서 김우중 당시 전경련 회장에게 상의했더니 절묘한 답을 내놓더군요.한 쪽엔 현대 의견을 쓰고,다른 쪽엔 LG견해를 쓴 후 전경련은 '정부가 판단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쓰라고 하더군요."

孫고문은 빅딜은 재계 자율이라고 말한다.전경련 40년사에도 '타율로 비쳐진 자율'로 기록돼 있다.정부가 빅딜을 하라고 명령하고 시한을 정하는 등 강제하긴 했지만,그 범위 내에선 정부가 업종 선정 등에 개입한 일도 없고 재계 자율적으로 일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빅딜 주역 입장에서 빅딜을 실패한 정책이라고 보지 않나요? 그리고 시장경제체제를 강조하는 분이 어떻게 시장경제에 반하는 빅딜을 찬성했는지요?

"찬성하진 않았어요.정부에서 해야 한다고 하길래 그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접합점을 찾은 것이죠.그리고 난 주역이 아닌 '복덕방' 역할이었어요.재계의 의견을 모으고,이를 정부와 조율하는 중개인에 불과했어요.또 빅딜은 시장경제에 반하는 정책이 아니었어요.당시는 시장경제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긴급상황이었어요.다 망하는 상황에서 부채의 출자전환이라든가 금리 감면,일부 부채 탕감 등을 해줄 수밖에 없었어요.언제까지 팔아라,부채비율을 2백%로 낮춰라,계열사 수를 줄여라는 등의 정부 정책들은 반시장적이지만,부도 직전의 기업들에게 응급주사를 놓는 것은 반시장적이 아니에요.또 빅딜을 실패한 정책이라고 하지만,실제론 정부가 지원 약속을 해놓고 대부분 약속을 안지켰기 때문입니다.출자전환이 제대로 안되고 추가지원이나 금리감면 등이 이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잔뜩 부실만 떠안은 기업이 잘될 리가 있겠어요?"

-6년간의 부회장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어요.아슬아슬한 고비가 참 많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신기하게 넘어갔는지 이해 안될 때도 많아요.특히 빅딜이 가장 많이 생각나요.하루종일 일하느라 이가 아픈데도 치료받을 시간이 없어 훗날 치아 3개를 빼고 틀니를 해넣었지요.당시 기자들이 따라붙을까봐 그룹 회장들을 지하의 주방 엘리베이터를 통해 회의실까지 오도록 한 것 등도 기억이 많이 나요.97년 2월 부회장이 된 후 재계가 '무노동 무임금'이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부당'등을 주장해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아요.그래서 일주일 내내 신문에 전면 광고를 실었더니 그제서야 여론이 우리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더군요.남북 정상회담 때와 김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행한 일,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유연성 등의 문제에 관해 대타협한 일 등도 기억나요."

孫고문은 또 오너 등 재계 리더들과 친하게 지낸 것을 가장 큰 자산으로 삼고 있다.예전부터 그는 4대 그룹 총수들과는 가까웠다.삼성 이건희 회장은 孫고문이 삼성 비서실 이사로 있을 때 상사였고,SK 손길승 회장과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각각 중학(진주중).고교(경복고)동창이다.LG 구본무 회장과는 고향(경남 진양)이 같다.

"특히 내가 모셨던 세 분의 전경련 회장으로부터 참 많이 배웠어요.고 최종현 SK회장은 정말 대인이었어요.미국에서 암수술을 받아 매우 불편한 몸이었는데도 崔회장은 97년 1월 '이러다간 우리 경제가 큰일 난다'며 팔엔 링겔을 꼽고,산소호흡기를 달고 청와대를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도 했어요.그해 12월인가,김 대통령이 '그때 최 회장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더군요.그는 또 당시 여의도에 있는 전경련 사옥이 낡고 좁다며,4대문 안으로 옮기려고 했어요.한국경제연구원과 국제경영원을 스위스의 IMD 같은 세계적인 경영대학원으로 키우려고 했지요."

그는 김우중 대우 전회장도 높게 평가한다.무엇보다 일에 대한 정열이 엄청났다고 기억한다.

"빅딜 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어느날 김 회장과 롯데호텔에서 새벽 2시30분에 헤어져 집으로 왔어요.잠깐 눈을 부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 대우 회장실로 오래요.시계를 보니 5시30분이었어요.정말 촌음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분이었어요."

그러나 孫고문도 金 전회장에 뒤지지 않는 '워커홀릭'이다.집에서 잠자는 시간이 하루 4~5시간이 채 안된다.조찬 모임과 저녁 약속 모두 하루에 2~3개씩이다.상가나 결혼식 등 관혼상제에 빠지는 법이 없다.이 때문에 아예 승용차에 베개를 비치해놓고 있다.그래서 그는 차만 타면 막바로 존다.

-그런 사람이 쉬면 병나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이 그러더군요.20년 가량 늙을 거라구요.그러나 진짜 잠을 푹 자고 싶어요.못읽은 책도 좀 보고.예전 동서증권 사장으로 있을 때 그렇게 바삐 활동하다가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으로 오니 정말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그 때도 잘 지냈는데요."

그는 지난달 하순 전경련 고문실로 옮겼다.공식적인 업무는 거의 없다.그야말로 휴식기다.일각에선 새정부 5년간 그는 '좋은 자리'로 옮기긴 틀렸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는 일생을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며 살아온 사람이다.승부욕도 시들지 않았다.언젠가 다시 비상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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