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사』 정립에의 시도|성균관대 주최 토론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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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한국의 대학은 해방과 함께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 기관이 역사상에는 없었던가 하는 것은 분명히 밝혀져야겠다.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대학과 한국사에 나타나는 고등 교육 기관과의 차이가 밝혀짐으로써 한국 대학사를 정립해야할 필요가 이제 논의되기 시작했다. 성균관대는 9일 「한국대학사와 성균관대의 개교 년도」를 주재로 한 토론회를 갖고 한국대학사 수립의 접근을 시도했다.
이 모임에서 김성식 박사는 「서구 중세 대학의 발생」을 제목으로, 신석호 박사는 「이조시대의 성균관」을 제목으로 강연했으며, 유홍렬 이상은 한기언 이인기 이가원 이기백 이우성 교수 등이 토론에 참가했다.
김성식 교수는 중세 대학이 처음에 「길드」 (조합) 라는 형태로 시작된 법적으로 자치하고 있던 집단, 즉 「우니베르시타스」였음을 상기시켰다. 선생 중심 체제였던 「우니베르시타스·마기스트라룸」과 학생이 운영 중심이던 조합 「스콜라리움」이 결국 대학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은 문화적인 개념이기보다 법적인 개념이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또 11세기말에서 13세기에 걸쳐 일어난 대학들은 국립이 아니고 사립이었다. 대학을 세운 자는 사회적으로 중간 계층이었으며 정통 학문은 신학이었다. 뒤에 로마법, 교회법, 의학 등은 차차 중심에 들어왔다.
대학의 위치는 교황과 국왕과 도시와 연관 관계에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교수들은 『하늘의 성좌와 같이 빛났다』고 할만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초국가적인 세계 시민적인 관념을 갖고 있었으며 교수와 학생 사이도 「튜토리얼·시스팀」을 통해 밀접히 연결되어 18세기까지는 교수가 결혼도 못하게 될 정도였다는 것.
이들 대학들은 학문 교육과 함께 정신적 수양을 위해 교회를 두었으며 교육 내용도 신학을 학문의 여왕으로 삼았지만 다방면의 교육을 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서구의 대학은 낭만적인 기풍이 가득 찼으며 때문에 여기서 닦아진 일반적인 교양인들로 하여 「르네상스」가 배태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사에서 대학으로서 구실을 하던 「성균관」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성균관은 국립이었으며 양반의 자제를 교육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언제나 국민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 정신 교육을 중시해서 문묘 배향을 하고, 주자학을 중심으로 교육했으나 교육 과정은 다방면에 걸치지 못 했다는 차이가 제시됐다.
특히 낭만적이었던 서구 대학생들에 비해 성균관생들은 너무나 규범적이었던 것이 특징이라 했다.
신 박사도 성균 유생이 청금이란 제복을 입고 마혜를 신고 평정두건을 써야하는 부자유 때문에 고심한 점을 인정했다.
서구의 대학이 자유를 구가하면서 정치 문제에 관여한 것에 비해 성균관은 처음에는 정치문제에 관여 못했으며 다만 불교와의 대립 관계나 선생 불신을 위해 동맹 휴교조차 일으켰으며 중종 이후에 비로소 정치 문제에 관여, 마침내는 당쟁에 이용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서구 대학과 성균관의 비교를 통해 한국대학사의 소급 연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토론에 들어가 한기언 교수는 『대학사가 서양의 중세에서 시작된다는 서구적인 발상법을 버리고 한국의 대학사도 고려, 또는 삼국시대로 소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상은 박사가 동양에서 이미 중국 주시대에 대학이 있었음을 강조함에 따라 한 박사는 대학을 구성하는 몇 가지 개념 즉 개교 이념·설립자·장소 건물·명칭 등을 실제적인 측면에서 비교했다.
오늘날의 성균관대학이 몇 차례의 개교 연도를 고쳐 1895년 갑오경장 후 경학과가 설치된 때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냐는 논의도 여기에 부가됐다.
성대를 성균관의 후신으로 보는 입장을 지키려면 고려 충렬왕 (1350년)때 세워진 성균관을 깃 점으로 해야하며 또 고려의 성균관이 개성에 있었던 점을 생각해 서울에 옮겨온 뒤를 깃 점으로 한다면 이조 태종 6년이 기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고려의 성균관이 몽고 지배하에서 고려 성종 (992년)때 만들어진 「국자감」을 개명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기점을 더 높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이 이미 삼국시대 고구려가 「대학」을 열고 있었으며, 신라가 「국학」을 세웠음을 확증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의 대학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까지 소급된다고 주장되었다.
한국대학사의 상한 설정이 이 같은 토론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접근을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균관대의 개교를 여기에 따라서 소급하는데는 적잖은 문젯점이 있다.
성균관대는 오는 5월에 「성균관사」를 발간함과 때를 같이해서 「한국대학사의 상한 문제와 성대 개교 연도」에 대한 좀더 진전된 논의를 가질 계획이다. <공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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