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국립 국악원 성경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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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립국악원이 10일로 개원 20주년을 맞았다. 민족 음악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피난 수도 부산에서 문을 열었던 국악원은 그 동안 4차례의 해외 공연을 가졌고 5월20일에는 2개월에 걸친 「유럽」 순회 연주를 계획, 성년 국악원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
『군번 1번이라고 농담들을 합니다.』
정년 퇴직이 내년이라는 성경린 원장 (61) 은 천진스럽게 웃으면서 26년 이왕직 아악부에 발을 들여놓아 (3기생)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악과의 반세기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8·15 이후 그나마 국악 계통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월급도 나오지 않던 때에도 운니동에 있던 국악원에 매일 나와 빈 사무실을 홀로 지켜왔던 것.
46년3월 당시 KBS에서 해설 「프로」로 한 국악 감상은 뒤에 제헌 국회에서 국악원을 국립 기관으로 승격시키는 계기가 됐다.
『방송 원고를 쓸 때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렸읍니다. 월급 한푼 없이 싸늘한 방 한구석을 지키면서 그래도 이것이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죠.』
그의 국악 감상은 김도태씨의 「국사 강좌」와 함께 가장 청취자가 많은 「프로」의 하나였다.
8·15를 맞고 6·25, 9·28 수복과 1·4후퇴 등 다난했던 시기에 국악을 지켜온 성 원장은 문교부 소속으로 국립국악원이 개원하면서 국악원 인사 발령 1호로 악 사장 임명을 받았고 61년에 초대 원장 이주환씨의 뒤를 이어 2대 원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의 음악서·고려의 전악서·이조의 장악원을 거쳐 일제시의 이왕직 아악부 등 변천 과정을 거친 국악의 맥락은 오늘날 단순한 궁정 악만이 아닌 전래의 민간 음악을 아울러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민족 정서의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음악·대중 가요 등에 압도되어 국악이 나아갈 길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입니다. 민족 고유의 전통 음악인 국악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공감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는 성 원장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가장 절실한 국악론인 듯하다.
옥보고·왕산악·우륵과 박연 등 악성을 배출하면서 동양은 물론, 세계에서 뛰어난 정악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36년간의 압력으로 침제 일로에 있던 국악은 이제 다시 국악원 안에 국악 사양성소 (중등교육 과정)를 두고 (55년) 그 동안 2백83명의 국악사를 배출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국악사들의 활동 무대는 너무 한정되어 있읍니다. 국악의 중흥과 발전은 활동 무대가 우선 보장돼야 합니다』라는 성 원장은 73년에 준공될 국립극장의 새 건물과 함께 국악 관현 악단을 창단하고 연주 무대도 갖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국악사들의 진로는 서울대 음대 국악과 (정원 15명), 국악원의 연주사직 (11명), 시립국악 관현 악단 (80명), 육군 국악대 (66명) 등이 전부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는 성 원장은 우선 전 20책으로 국악을 악보화하며, 방중 악기로 음량이 작은 국악기들을 연주용 악기로 개량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번 5월에 떠나는 「유럽」 순회 연주 여행은 프랑스·서독·이탈리아·스위스 등을 거치게 되는데 이는 외국에서 뿐 아니라 국내의 국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도 뜻이 있읍니다』라고 성 원장은 여운을 남긴다. <권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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