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문화 연구소 학술 발표회서 (하)|인문 과학 연구의 변천과 과제|김동욱 <연세대 교수·국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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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에게 「자인」으로서의 문화가 2천년 동안 있어 오는 동안 「졸렌」으로서의 「학」 이 언제부터 있었는가는 문제다.
불교면에서는 원효·의상·경흥이 재세시에 중국 불교를 종합했고, 15세기에 허조가 예를 종합했으며, 16세기에 퇴계·율곡이 송학의 한국적 체계화를 꾀함으로써 기념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학문은 전통의 산물이지만 이 전통의 인식이 학으로서의 자각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러한 계기를 국가적 사회적 생산적인 활용에 따라 인문 과학의 진흥을 좌우하게 된다.
우리 선인들은 이런 계기를 잘 활용치 못했기 때문에 한국의 인문 과학 연구가 낙후성을 면치 못한 것이다.
과거 우리의 인문 연구는 서구의 르네상스가 지녔던 발전적 계기도 없었고 독일의 문헌 학파나 일본의 국학파가 의식했던 절박감이나 지도 이념으로서의 민족적 의식도 결여돼 있었다.
개화 이후 모든 학문 연구는 출발점에서 일인에게 수십년 뒤졌고 합병 후 우민 정책의 가중화로 후진성을 더 깊게 했다.
식민지로서의 한국을 인식하기 위해 일제가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한국의 민속·풍속이었다. 1910년의 『조선 사회고』를 비롯해 『조선 종교사』『조선 풍속집』『조선 도서 해제』『조선어 사전』『조선어 학사』등이 그것이다.
해방 후에는 국토 양단으로 학문 풍토가 지리멸렬 됐으며 「한글학회」가 정책 위선으로 타락한 것도 이때였다. 학자들이 「보따리 장수」행각에 나섰고, 차분한 연찬이 필요한 인문과학 분야에서 기초가 없는 홍길동들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그 후유증은 오늘도 심각한 것이다.
가난으로 말미암은 「신 쇄국주의」는 해외 학계와의 교류를 외면해서 한국 학계를 고아로 만들었다. 특히 6·25 동란으로 도서 문화재·고문서가 대량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 문화 말살의 참상은 몽고란·임진란에 비길 바 아니었다. 여기에 다시 한글 전용이란 공룡이 나타나 문화의 구질서- 적어도 국학이 서야 할 기반을 베어 먹었다.
20년간의 이 상대적인 문맹 정책이 없었던들 한국의 인문 과학 연구는 밝은 서광을 비쳤을 것이다.
더우기 한국 대학가의 이상 비대증과 도서 구입비의 영세성 및 정책적 배려의 부족 등은 앞날을 암담케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 과학은 역경 속에서나마 상대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국제적 수준에선 너무나 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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