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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10주기 맞은 유림 선생 회상|권오돈 (전 연세대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단주 유림 선생이 회천하신지 오늘로써 10주년이 된다.
선생은 1894년 전주에서 태어나 61년4월1일 세상을 뜨기까지 그의 일생은 민족의 수난, 바로 그것이었다. 23세 때에 대구에서 자강회를 조직하여 복국 운동을 벌이다가 왜경에 체포된 것을 처음으로 항일 투쟁·구국 운동의 가시밭길을 걸었으며 이 어려운 고비에서 끝까지 기개와 절개를 지켰다.
내가 처음 선생을 뵌 것은 1926년 겨울 만주의 봉천에서였다. 그때 선생은 33세였고 고매한 이상으로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서 의연한 기개를 지니고 계시었으며 만주에서 한국으로 잠입하기 직전이었다. 선생은 곧 국내에 들어왔다가 왜경에 잡혀 고초를 당했다. 두번째로 선생을 뵌 것은 대전 감옥이었다. 형리들의 감시가 심해 인사 한마디 똑똑히 못했으나 나는 이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을 선생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선생은 이때 외아들인 유원식씨를 데리고 수감되어 있었다.
원식씨는 수감 중 폐가 나빠져 빠른 시일 안에 적절한 요양을 해야하게 되었는데 일본 경찰은 이를 미끼로 교회사를 통해 선생에게 다시 독립 운동을 안 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가석방해 주겠다고 제의, 회유하려 했으나 이때 선생은 한마디로 이를 거절, 자식 보다 나라가 중하다고 굽히지 않았다.
선생의 철석같은 결심에 놀란 교회사라는 자는 다시 선생에게 내가 말하는 것은 출감 후 독립 운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이곳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말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말했으나 선생은 다시 말하기를 『나라를 구하고자 몸을 바친 사람이 일시 방편이라 할지라도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어 교회사는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었다.
10주기를 맞아 수유리 묘소에서는 추도식이 열려 선생의 공을 추모했으나 선생에게 드릴 가장 큰 보답은 조국의 통일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이외는 다시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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