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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사'가 아닌 '금강초롱'으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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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금강초롱을 사랑하는 모임’ 멤버들이 강원도 평창의 야생화밭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준혁 경희대 교수, 수원환경운동연합 김현희씨, 이향재씨, 안민석 의원, 권용택 화백, 이동렬 중앙대 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먼 옛날, 금강산 깊은 산골에 부모 없는 오누이가 살았다. 어느 날 누나가 병에 걸리자 남동생은 약초를 찾아 산으로 떠난다.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기다리던 누나는 초롱불을 들고 길을 나섰다가 산중턱에 쓰러지고 만다. 약을 구해 돌아오던 동생은 숨을 거둔 누나를 발견하고, 누나 옆에는 초롱불이 한 송이 꽃이 돼 피어 있었다.’

 금강산 오누이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금강초롱꽃. 경기도 가평 북쪽의 그늘진 산속에서 8~9월에 꽃을 피우는 한반도의 고유식물이다. 하지만 세계 식물학계에서 통용되는 금강초롱꽃의 학명은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Hanabusaya asiatica Nakai)’다. 일제 강점기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이 1911년 금강초롱꽃을 새로운 속(屬)으로 명명하면서 자신에게 조선식물 연구를 제안한 초대 주조선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이처럼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된 금강초롱의 학명을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과 민주당 안민석 의원, 화가 권용택씨, 경희대 김준혁 교수 등은 최근 ‘금사모(금강초롱을 사랑하는 모임·가칭)’를 만들고 학계·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금강초롱 학명 변경을 위한 문화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한반도 자생식물인 금강초롱의 일본식 학명은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다. 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가리왕산에 핀 금강초롱꽃. 음지에선 하늘색, 햇빛을 밭으면 보라색으로 변한다. [사진 권용택]

 ◆우리 꽃에 왜 일본이름이?=식물의 학명은 이를 처음 발견하고 연구한 사람이 붙인다. 국제식물명명규약(International Code of Botanical Nomenclature·ICBN)에 기초해 속명(屬名)과 종소명(種小名·속 내에서 그 종이 갖는 특징), 명명자를 라틴어 형식으로 적는다. 금강초롱의 경우 ‘하나부사야’가 속명이고, 아시아에서 주로 자란다는 의미에서 ‘아시아티카’라는 종소명이 붙었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직으로 조선식물 연구를 했던 나카이는 ‘금강초롱꽃속’을 비롯해 ‘금강인가목속(Pentactina·1917)’, ‘미선나무속(Abeliophyllum·1919)’ 등 다수의 한국 특산속 식물을 발견했다. 그 중 몇몇 식물에 일본식 학명을 붙였다. ‘하나부사’가 된 금강초롱을 비롯해 조선화관(朝鮮花菅)·평양지모(平壤知母)라고 불리는 꽃의 학명(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952~1919)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울릉도가 원산지인 섬초롱꽃의 학명은 ‘캄파눌라 다케시마나 나카이(Campanula takesimana Nakai)’다.

 ◆학명 변경 가능할까=식물 학명을 변경하려면 6년마다 열리는 국제식물학회 식물명명분과 회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국제식물명명규약’은 식물 분류의 안정성을 위해 학명 수정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규약에 따르면 학명 변경은 식물 분류군의 통합·분리 등 분류학적 변화가 생겼을 때, 혹은 식물이 다른 분류군으로 잘못 분류된 사실을 발견했을 때 등으로 제한된다.

 식물학자들은 금강초롱의 학명 변경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강원대 생명과학과 유기억 교수(식물분류학)는 “학문적인 이유가 아니라 역사적·감정적인 이유로 학명이 수정된 전례가 없다. 학명은 세계적인 약속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경희대 김준혁 교수(후마니타스 칼리지)는 “학명 자체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해도 금강초롱의 학명에 담긴 비극적 역사를 널리 알리고, 가능한 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금사모’는 올해 말 모임을 발족하고, 일본식 학명이 붙은 우리 꽃에 대한 역사학계와 식물학계의 공동연구 등을 제안할 예정이다. 또 내년 가을 권용택 화백을 비롯한 100인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금강초롱 백송이 : 우리꽃말 되찾기’ 특별전도 계획하고 있다.

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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