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 민주주의' 에 막혀 멈춰 선 미국 정치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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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취임한 2009년 1월 20일 오후. 워싱턴의 한 호텔에선 정권을 민주당에 빼앗긴 한 무리의 공화당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에릭 캔터, 폴 라이언, 케빈 매카시, 피트 세션스 연방하원의원, 그리고 짐 드민트, 밥 코커 연방상원의원 등이었다.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도 모습을 보였다. 모임을 주선한 사람은 미 공화당의 최대 선전가이자 이론가인 프랭크 룬츠였다.

오바마에 맞서면 단숨에 공화당 스타로

 프리랜서 언론인인 로버트 드레이퍼는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묻지 마라 : 하원의 속사정』이라는 책에서 이 모임을 소개한 뒤 “당시 워싱턴의 파워맨들이 참석한 4시간의 모임에서 모아진 의견은 하나였다”고 전했다. 바로 “오바마 대통령 임기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공화당의 이념을 끝까지 고수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의회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자는 결의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결의가 있고 난 뒤 4년8개월이 지난 지금 미 연방정부는 17년 만에 셧다운(폐쇄) 사태를 맞고 있다. 오바마의 대표 공약들도 공화당이 친 그물에 갇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개혁안, 이민법 개혁안, 총기소유 규제법안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7월 민주당 의원들이 전원 반대하는 가운데 공화당 주도로 하원을 통과한 농업법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한 미국 내 빈곤층 지원을 위한 ‘영양보충보조 프로그램(푸드스탬프)’이 몽땅 빠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지난 6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비토크라시(vetocracy)가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비토크라시는 거부를 뜻하는 ‘비토(veto)’와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합성어로 ‘거부 민주주의’로 불린다. 강력한 반대자가 조금만 있어도 정부·여당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입법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여소야대인 미 연방하원의 경우 435명 중 야당인 공화당이 232명이다. 이 중 티파티 세력으로 대표되는 강경파는 5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50여 명의 강경파가 공화당 내 의사결정을 좌우해 연방정부 셧다운까지 초래했다는 게 미 언론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6개월간 법안 처리 15건, 역대 최저 기록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232명의 공화당 하원의원 중 205명은 공화당이라는 이름의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미 중서부와 남부에 지역구를 가지고 있다. 내년 중간선거에서 이들의 경쟁자는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공화당 내부 인사다. 그렇다 보니 오바마 대통령이나 민주당에 맞서 강경하고 선명한 반대 주장을 펴야 살아남는 구조다.

 문제는 의원들에게만 있지 않다. 의원들을 강경으로 내모는 보수단체들도 비토크라시의 주범이다. 지난 2월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실세였던 에드윈 미즈 전 법무장관은 미국 내 보수단체 30여 곳 대표들의 모임을 워싱턴에서 열었다. 참석자들은 오바마케어 폐지 계획을 공동으로 채택했다. 뉴욕타임스는 그 이후 티파티 계열의 대표 단체인 ‘티파티 패트리어트’가 예산안 협상이 본격화하기도 전인 9월 초 오바마케어에 반대하는 논리를 담은 문건을 배포했는데, 여기에 이미 셧다운에 따른 대응 논의가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다. 셧다운이라는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바마 대통령에 맞선 정치인은 단숨에 보수세력의 대표로 발돋움한다. 드론(무인항공기) 사용에 반대해 13시간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한 랜드 폴 (캔터키)공화당 상원의원과 오바마케어에 반대해 21시간 필리버스터를 한 테드 크루즈(텍사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일약 차기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중도 유권자 결집해야 파당정치 사라져”

 상황이 심각한 건 비토크라시로 대표되는 미 의회정치의 문제가 앞으로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1980년대 이래 미 정당정치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며 “당 내 당인 파벌주의가 중간지대를 없애고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공화당 내에서 협상과 타협의 달인으로 불리는 미치 매코널(켄터키) 상원 원내대표는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주도하는 오바마케어 논란에서 강경파에 밀려 존재감조차 없다.

 비토크라시는 점점 낮아지고 있는 법안 처리율로도 나타난다. 올 1월 개원한 113회 의회는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이라는 최종 성안 절차까지 마친 법안이 6개월 동안 15건에 불과했다. 47년 이래 최저 기록을 낸 112회의 경우 같은 기간 23건이었고, 111회 땐 34건이었다. 그나마 학자금 대출 관련법이나 우체국 개혁법 등 민생과 관련이 깊은 법안들은 제외됐다. 브루킹스연구소의 토머스 맨 연구원은 “113회 의회는 역대 최저를 기록한 112회보다도 생산성이 낮다”며 “대통령과 관련된 법안의 경우 하원은 협상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95년부터 2008년까지 버지니아주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톰 데이비스(공화당) 전 의원은 “공화당의 대부분 의원은 오바마의 어젠다를 막기 위한 활동에만 관심을 보인다”며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힘을 갖지 않는 한 파당정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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