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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의 이름 남긴 고 유일한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유일한 주식회사 유한양행 회장의 서거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애통케 하고 있다.
그는 우선 기업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새 경영 기법을 도입 실시함으로써 여러 분야에서 우리 나라 기업 경영의 선구자적 역할을 다 했다.
민간기업으로서의 주식공개(62년)는 경방에 이어 두번째가 되지만 그때 벌써 유한양행 사무실 구조를 미식으로 개편, 사무의 능률화에 나섰으며 66년에는 미국에 있던 외아들 일선씨(37)를 귀국시켜 부사장에 앉혀 잠시나마 경영을 맡김으로써 세대 교체를 처음으로 단행하기도 했다.
또 유 회장은 68년 4월 민간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컴퓨터(IBM1401)를 도입, 기업경영의 혁신을 시도했었다.
이 「컴퓨터」는 약1년 후 한국전자계산소에 이관 됐는데 이 조치는 『새로운 기법도입에 과감하되 잘못을 시정하는데도 과감해야 한다.』는 고인의 투철한 기업경영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68년8월 일선씨도 경영일선에서 손을 떼게 하여 자본과 경영의 완전한 분리를 단행했다.
자본금 4억8천만 원에 연간 무상고 30억 원이 넘는 유한양행 주식은 상장 이후 줄곧 최고의 배당률을 자랑해 오고 있다.
이같은 고율의 배당은 『유한양행은 자산 주로서 직업 없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육영사업과 기타사회사업에도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쓸 줄 아는 실업인이었다. 신문에서 불우한 사람들의 얘기를 읽으면 거의 빠짐없이 5만원, 혹은 10만원을 선뜻 내놓곤 했다. 이밖에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 유한학원재단(유한 중·공고), 보건장학회 등은 영속적 사업으로 직접 창설, 특별히 후원해왔다.
기업이라고는 유한양행과 한미합작회사인 유한킴벌리 등 두개로 그 규모는 과히 크지 않다.
사채를 전혀 쓰기 않았으며, 또 한때 국세청 세부사찰에서 한달을 뒤져봐도 티없는 기업으로 밝혀져 조사원들을 오히려 놀라게 했던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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