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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자기 말에 책임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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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

기초연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여당이 대선 때는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최근 국가재정 형편상 국민연금과 연계하고 소득수준 하위 70% 노인에게만 지급할 수밖에 없다고 공약을 수정하자, 당장 야권에서는 ‘공약 먹튀’라고 비난하고 주무 장관은 자기 소신과 안 맞는다고 사퇴해 버렸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 사과까지 했지만, 원칙을 중시하고 공약을 지키겠다고 공언한 대통령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선거 공약을 모두 지키는 경우는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 대학총장 선거, 심지어 초등학교의 반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선거 때 절대로 새로운 세금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가 결국 임기 중에 세금을 올려 큰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사실 선거 때는 소수의 인원이 제한된 정보로 공약을 만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공약을 내세우는 일이 많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국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여러 사정상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공약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솔직히 국민에게 밝히고 공약을 수정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실현이 어려운데도 국민을 속이고 후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은 정치인의 말 바꾸기보다 국가적으로 더욱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의 공약이 정말 실천 불가능한 것인지, 수정된 안이 가장 최선인지는 언론과 국회 등에서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인 말고도 말의 신뢰도가 중요한 사람들로 학자나 언론인을 포함한 전문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회의 이슈들은 매우 복잡해 보통 사람들은 그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고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하고 세계 금융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 분야의 전문가 아니면 정확히 알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의존하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크게 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도 사고가 터지기 전에는 그 위험성을 심각히 거론한 전문가가 거의 없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까지도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적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 과거로 돌아가보면 국내외 많은 전문가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을 반대했었는데, 만일 이들의 의견에 따라 두 사업을 접었더라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얼마나 뒤처졌을 것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물론 전문가들도 신(神)이 아닌 이상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의견을 믿어온 일반인들을 위해서라도 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잘못된 예측을 하게 된 이유를 해명하든지 해서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는 해명이나 사과는커녕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음 이슈가 생기면 거기에 대해 또 전문가로 행세하며 의견을 내곤 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편협한 이념에 사로잡혀 사실을 공정하게 보지 않고 자신이 미리 내린 결론에 사실을 짜맞추려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절대 인정하지 않으며, 일반 국민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바람직한 결론을 내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는 작용만 한다.

 이보다는 덜 심각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자기의 결론에 부합하는 사례나 통계만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필자 본인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은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이지만, 이런 경향이 심하면 일반인들이 균형 잡힌 판단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 최근 기초연구비의 집중화 현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어떤 논자는 기초연구의 다양성이 중요하고 일본에서는 많은 연구자에게 기본연구비를 깔아주기 때문에 노벨 과학상이 여럿 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기초연구에서 다양성과 저변확대의 중요성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작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 교수에게는 수천억원의 연구비를 몰아주기도 했다. 이처럼 저변확대와 더불어 유능한 학자를 선택해 집중지원하는 시스템도 있는 것이다. 결국 두 가지 목표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데, 한 가지 중요성만 강조하면 큰 그림을 놓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정치인이나 전문가나 객관성과 공공의 신뢰성을 지키면서 자기 말에 책임지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