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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마다|김필례 <정신학원 이사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기미 만세 사건이 일어났던 1919년 나는 27살로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나는 요원의 불처럼 서울에서 번져온 『독립 만세』가 3월13일에는 광주거리를 뒤흔들던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 생각은 내가 철들어서 전부를 겪은 일제 36년의 모든 것을 회상하게 한다.
내가 정신학교를 졸업한지 1년 후인 1908년, 우리 나라는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군대는 해산되었다. 새벽 4시에 해산령을 들은 덕수궁의 시위대들은 일본 군대에 대항했으나 화약고가 이미 잠기어 총알이 떨어지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남대문 쪽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브란스」 학생인 오빠를 따라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 구내의 사택에 살고 있던 우리 식구들은 새벽의 총성에 놀라 일어났다.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이었다. 손구루마에 장작더미처럼 포개어 실린 구한국 마지막 군대의 사상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상처에서 솟아오르는 피를 씻어내려 손구루마가 들어오는 길은 온통 피바다였다.
그날밤 오빠는 손이 몹시 부족하다면서 나와 여동생, 그리고 큰오빠의 딸인 세 조카에게 『너희들도 나가서 「나이팅게일」처럼 도우라』고 말했다. 『과년한 여자애들이 남자를 어찌 간호하겠느냐』고 어머니는 펄펄 뛰셨으나 사춘기 소녀였던 우리들 다섯명은 팔을 걷고 나섰다.
제나라 안에서 일본 군대의 총검에 찔린 군사들은 하룻밤새에 10여명씩 숨을 가두어 갔다. 나는 울면서 울면서 나라의 운명을 슬퍼했고, 그날 밤 16살 소녀는 『공부를 더해서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결심했다. 다음해에 나는 일본에 건너가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했고, 한반 애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원수」처럼 보이는 갈등을 이기노라 애썼다.
8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YWCA를 조직하고 광주에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세우고 각종 여성 운동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나는 「백기」를 잊고 일했었다.
이제 조국은 해방이 되었고, 해방 후 26년 동안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고 이 나라 여성들은 「애국」이란 말을 잊고 지내도 좋은 행복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80고개를 앞에 둔 나는 좋은 시절에 살게된 그들을 바라보며 때때로 심각한 기우를 갖기도 한다.
너무 사치한 것은 아닐까,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아이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심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라에서 세금을 받으러 오면 다음에 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미장원에 가서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역사와 나라의 앞날을 혹시 의식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염려는 끝이 없고, 이것은 나뿐 아니라 나라 없는 설움을 겪으며 살아 본 모든 사람의 염려일 것이라 믿는다.
우리 세대가 해온 애국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대도 환경도 변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대로 좋을 것인가-다시 온 3·1절에 나는 또다시 염려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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