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북극항로의 여 선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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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찬삼 노르웨이에서 제 1신>
노르웨이 하면 흔히 바이킹을 생각하겠지만 그보다는 문학가 입센·음악가 그리고 화가 뭉크 등 북구의 우수가 깃들인 예술이 더욱 큰 향수를 자아내지 않을까.
10여년 만에 다시 찾는 해후의 땅이기에 오래도록 이별했던 애인을 만나는 것 같은 울렁거리는 기쁨을 안고 아이슬란드에서 여객기를 타기로 했으나 기상 관계로 예정시간보다 무려 20시간이나 늦게 떠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전의 큐라세오에서와 같은 아무런 판상을 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북해의 기상이란 매우 변덕스러워 예측할 수 없어서 으레 늦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기 때문인가 보다.
오전에 여객기가 떴는데 내려다보니 북해의 물결 위엔 수증기가 깔려 꿈나라를 나는 기분이다. 수증기가 생기는 것은 한류와 난류가 부딪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후 노르웨이의 서쪽에 있는 제 2의 도시 베르겐의 공항에 내릴 때는 찬비가 뿌리고 있었다.
이 베르겐이란 이름은 옛날에는 산들 속의 목장이라는 뜻이었다고 하는데 이 나라의 제 1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던 유명한 한자 동맹 시대에는 상인들의 주재지였다. 이런 전통을 이어 받은 상업 도시이긴 하지만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여서 시민들의 모습에는 한결 같이 교양미와 지성미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노르웨인 왕국으로 썼던 고색 창연한 베르겐후스 성이 있어 그 옛날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는 가장 순수한 게르만 북방 민족이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하여 민족적인 큰 긍지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의지가 굳은 민족으로서 눈은 파랗고 머리카락은 노란 것이 이 나라 사람의 특색이다. 유럽에서는 가장 키가 큰 때문인지 특히 거리를 거니는 여성들은 늘씬하여 모두가 육체파미인 같으며 하늘처럼 파란 눈, 금계보다 더 눈부시게 보이는 블론드는 더욱 아름답다. 이 도시엔 유한 마담이나 노는 여자라고는 보이지 않으며 걸음걸이들이 빠른 때문에 매우 다이나매믹해 보인다.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금발의 미인이 앞에서 건너오기에 길을 물으려고 인사를 했더니 마치 연인을 대하듯 가까이 다가서서 벽안에 미소를 띠고 진주와도 같이 고운 이를 드러내며 길을 가리켜 주었다. 하도 애정이 넘치기에 혹 이 못난 나에게 무슨 연정을 품지 않았나 하고 흐뭇해하는데 이 여성은 『안녕!』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처음엔 적이 실망했으나 일에 바쁜 이 나라 여성의 이른바 노동미가 이를 데 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진 돈이라고는 미화로 3달러뿐이어서 점심도 굶고 우선 빙하계곡 위에 서 있는 값싼 국제적인 여인숙을 찾았다. 여기서 여독을 풀면서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1차 여행 때 들렀던 코스가 아닌 북해 쪽의 그 많은 피올드(협만)를 보면서 소련과의 국경까지 가기 위하여 이 나라의 최북단이면서 또한 대륙의 최북단이 되는 키르크네스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베르겐에서 최북단까지 5천리나 되는 항로를 해안선을 따라 6일간 걸린다는 2천6백t급의 여객선을 탔다. 선원은 모두 선장까지 합쳐서 62명인데 놀랍게도 그중 30명이 여자이다.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여자 선원이 있는 나라의 선박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설령 있더라도 극히 적은데 이 노르웨이 선박은 반수나 차지하니 여자들도 얼마나 해양에 진출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과연 바이킹의 후예랄까, 방한모를 쓰고 일하는 이 여자 선원들에게는 바이킹의 복장이 어울릴 듯, 칼이라도 쥐어주면 남자 못지 않게 싸울 것 같은 늠름한 기세이다. 입센이나 그리크의 작품에 나오는 현모양처로서의 솔베이지형이 아닌 바이킹형 여성이다.
여자선원엔 스튜어디스도 있고 청소를 하는 여자도 있다 북해의 파도는 거세어 하도 배가 흔들리어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데다가 찬 물결이 갑판 위까지 휩쓰는 밤인데도 어떤 여자는 더러운 공동 용변기를 씻느라고 팔을 걷고 일하고 있다.
이렇듯 씩씩한 여자를 물끄러미 보노라니 머리가 절로 수그러진다 .여성적인 것만이 오직 우리를 구원한다는 파우스트의 말이 있는데 여성의 자비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니체 적인 권력의지 아닌 노르웨이 여성다운 일하는 의지만이 조국이나 세계를 구원한다면 나의 역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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