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와 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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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침 산책을 나가는 길에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았다. 6세 가량 되는 어린 소년 두 명이 태권도복을 입고, 도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지나갔고, 그들은 태권도의 「폼」을 잡으며 대들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울상이 되어 달아났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고 싱긋 웃는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로 어처구니없게 여겨졌다. 도대체 6, 7세 되는 어린것들에게 태권도를 배우게 하는 부모의 의도는 무엇일까. 물론 태권도가 하나의 호신술(호신술)과 순수한 의미의 운동으로서 대단히 유효한 것임을 나도 알고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도 태권도를 배워 이미 흑 띠를 맬 정도이다. 그후로 내성적이요 소극적이던 아이가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박력 있는 아이로 변했다. 성격이 달라졌다. 하지만 태권도는 내가 알기로는 무척 과격할 뿐만 아니라 인격이 함께 수련되지 않으면 위험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6, 7세 되는 어린것에게 배우게 하는 부모의 의도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만일 그분들의 의도가 단순한 운동(신체단련으로서는 지나치게 과격하지만)으로서가 아니고, 그들이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서 어떤 경쟁에서도 이기도록 그들의 정신을 연마하려는, 이른바 사회적·인생 적인 가치관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이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승부의 결투가 아니며, 사회는 그것의 결투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것이 태권도를 배운답시고, 자기 또래의 어린것들에게 으시대는 그것부터가 올바른 태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리들이 한결 친화력을 가질 수 있는 삶의 터전이다.
혹은 그분들의 의도가, 오늘날의 혼란된 사회 속에서 귀여운 자녀들이 저를 저 자신이 지키는 힘을 길러 주려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6, 7세의 어린것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이다.
위에서 내가 본 광경은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오늘날 같은 혼란시대에 자녀를 바르게 교육시키고 그들을 지키려는 부모로서의 애정에서 우러난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사회적인 혼란이나 교통지옥에서 자녀들을 지키고 가르치는 방법은 한마디로 부모 스스로의 생활이 바른 가치관에 입각하여 수범 적인 것이 되어야한다.
만일 부모의 준법정신이 투철하면 어린아이들도 함부로 길을 건너는 일은 삼가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위험 율이 어느 정도 방지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부모가 바르게 사는 생활에 젖어있는 어린것들이 비뚤어지게 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고 그들을 사회악에서 지키려면, 부모가 먼저 저자신의 생활이나 인생관을 반성하는 일이 앞서야 한다. 그런 후에 교훈적인 말로써만이 아닌 따뜻한 사랑으로써 그들을 품어주고 그들에 대하여 끝없는 관심을 가지는 성의가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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