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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19)-기생치마폭에 붓으로 시 쓰고 고담준론에 밤 깊은 줄도 몰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세상이 온통 흐려지고 명월관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뒤늦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언론인과 문인들의 존재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학문을 닦고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명월관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기생들은 이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
대충 1930년대의 전후라고 할까. 하루는 양복장이 신사들이 그득한 연석에 모르는 사람이 한분 나타났다. 옥양목두루마기에 「도리우찌」 모자를 썼고, 신발은 자동차 「타이어」속으로 만든 경제화를 신고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좌석의 손님들과는 어울릴 옷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손님은 방을 잘못 들어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좌중에 계신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육당 선생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었으나 백운선의 영변 가를 좋아하셨고, 음성은 쇳소리였다. 내가 육당 선생의 처음 본 인상을 「복덕방목침」같다고 손님들에게 말했더니 그후 이 말은 육당 선생님의 별명처럼 돼버렸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얼굴 색이 유난히 빨갈 것이 인상에 남아있으며, 수주 변영노 선생은 그때부터 술을 많이 들었는데 김금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1930년께는 춘해 방인근씨가 주동이 된 동부인회가 가끔 명월관에서 베풀어졌다. 이 모임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춘원·박인덕·의사 백인제씨·「세브란스」의 전 학장 오긍선씨·음악가 백명곤씨·숭실 전문교수이며 「테너」가수였던 차재일씨·변호사 등 제제다사 였다.
김억·김동인·윤백남·안석영씨 등 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택상씨는 거액의 수표책을 들고 다니던 영국신사 모습이었고, 청전 이상범·심선 우수현씨 등 화백도 더러 오셨는데 청전 화백은 술이 취하면 그림을 즉석에서 그리기도 했고 명필로 이름높았던 송영기씨는 붓을 입에 물고 기생치마폭에 시를 쓰기도 했다.
월난 박종화 선생은 원래 천향원이 단골집이었지만 가끔 명월관에 오셨고 최독견씨 김억씨 등과 함께 주로 청담을 즐기는 분들이었다. 또한 수주 변영노씨는 술을 많이 드셨고 우리들에게 그의 시 논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한편 이 무렵 언론계에 있는 분들도 자주 명월관에 들러 모임을 갖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하며 고당준론에 밤 깊은 줄 몰랐다.
1932년 중외일보 사회부장이시던 김팔봉 선생께서는 뜻밖의 빈객을 맞게 되었다. 그때 동남아순회 특별취재를 맡았던 미국「뉴요크·타임스」특파원 일행 4명이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팔봉 선생께서는 곧 명월관에 1인당 15원 짜리 최고급 요릿상을 주문했다. 그러나 명월관측 대답은 그와 같은 고급 상은 일찌기 만들어 본 일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10원 짜리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으나 명월관이 갖고있는 산해진미와 기술을 총동원해도 10원 짜리 상을 만들 수는 없다는 대답에 최고급요리는 결국 7원 짜리로 낙착되었다는 것이다.
팔봉 선생은 당시 동아일보의 주요한씨, 조선일보의 이관구씨 등과 함께 이들 특파원 4명을 명월관에서 맞았다. 지금생각해도 그때 장사하는 사람들은 요즘처럼 요릿 값을 먹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바가지 씌우는 일은 없었다.
언론인 중에서 납북된 정인익씨는 육자배기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그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서범석씨는 「댄스」를 잘 추었다. 김팔봉 선생은 술만 취하면 그 자리에 잠드는 습관이 있었는데 친구분들이 깨우지 않으면 다음날 아침 그 자리에서 깨어나 출근하기로 했다.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은 분이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명월관에 장춘각이라는 그윽한 특실이 있었고 2층은 피로연을 할 수 있는 큰「홀」이 있기 때문이며, 그 보다는 외상이 후하고 외상값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은 때문도 있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술 마시는 풍습은 주로 요릿집에서 1차를 하고 「에인젤」낙원회관, 「퀸」등「카페」와 「바」에서 2차를 하는 것이었다. 「카페」와 「바」에는 지금처럼 「호스테스」가 흔하지 않았다. 여흥이 도도한 일부는 「콜·택시」를 불러 1원∼2원만 주면 한강변이나 근처의 절간에 「드라이브」하기도 했다. 주로 찾는 곳은 동대문 밖 개운사·우이동·화계사·청량리 청량사·탑골승방 등이었다.
이중에서 청량사로 가는 지금 임업시험장근처에는 「오줌고개」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약간 가파로운 언덕으로 언덕마루를 넘을 때 덜컹하고 받는 충격을 받고 이어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 갑자기 스르르 미끄러지는 바람에 온몸이 짜릿짜릿해온다고 해서 「오줌 고개」라는 별명이 붙어 명소 아닌 명소로 꼽혔다. <계속> 【이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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