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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 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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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뒤숭숭하던 경술년이 막을 닫고 신해의 새아침이 밝아왔다. 토정비결을 뒤적이는 선남선녀들이 거리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다복을 상징하는 돼지해이므로 그 돼지꿈을 풀이하려는 심점이겠다.
흔히 해몽을 하는데 영달에는 까치, 재물에는 돼지를 치는데 그중에도 돼지꼬리를 가장 길한 것으로 풀이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2대 유리왕은 달아난 돼지를 쫓다가 길지를 얻어 도읍을 정하니 바로 국내성이다. 이러한 얘기는 또 고려태조의 송악정도설에도 나온다. 왕건이 장인으로부터 칠보대신으로 돼지를 선물받아 오다가 송악남쪽 꼴짜기에 이르러 돼지가 누우므로 명당이라 생각하고 도읍하였다. 그 만월대근처를 금돈처라해서 풍수설에서 명당으로 친다.
신라21대 소지왕의 사금갑 고사에도 돼지로 인하여 행운을 얻은 얘기가 있다. 돼지싸움을 구경하다가 사금갑속에 숨어있는 궁녀와 승려를 발견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이 봉투를 떼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왕)이 죽는다』는 수수께끼설화의 해명이다. 한자에서 신과 해의 두 글자는 3천년전에 쓰여진 갑골문에서부터 많이 나타난다.
신은 그 기원으로보면 끝이 날카로운 뾰족한 연장을 그린 그림문자다. 신즉 날카로운 칼에 찔리면 우선 아픔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므로 쓰라리다 맵다는 뜻이 생겨났는데 또 연장으로 나무를 자르는 의미에서 주이 되었고 다시 그 의의를 명확히 하기위해 까뀌의 뜻인 근를 붙여서 신이 되었다. 곧 신은 까뀌로 생나무를 자른다는 뜻에서 생생하다 새롭다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다음으로 해는 갑골문에서 보면 돼지모양을 그리어 시와 거의 동일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후대에와서 해는 위에 점하나를 붙여서 새끼낳은 돼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무슨 운수가 꼭 60년만큼 반드시 순환되는것은 아니지만 우연하게도 우리나라 역사상 신해년에는 그리큰 사건이 없다. 60년전은 경술국치 이듬해이므로 사내일본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이 있었을 뿐이고 1851년에는 장마가 들어 수해가 심했다. 1671년에는 팔도에 기근이 컸고, 그래서 나라에서는 유기아에 대한 수양법을 마련했다.
이조 성종연간인 1491년에는 북정을 의정하고 허종을 도원수로 삼는 한편 두만강을 건너가 오디개(올적합적)를 쳐서 북쪽변방의 화근을 멀리 쫓았다. 1371년에는 요승 신돈의 무리를 포주해 유배시켜 버림으로써 고려조정에 안정을 꾀했다. 1251년 신해는 고려대장경의 조판이 완성된해요, 신라성덕왕때, 신해년(771)에는 왕이 신종을 주조해 봉덕사에 바치니 지금 경주박물관에있는 에밀레종이다.
역사는 반복될 수 없는 것임에도 그 상황은 서로 많은 유사성을 띠는 것이 아닐까. 바라건대 KAL기납북·모산 자동차사고·중앙선기차사고 및 남영호침몰등 쓰라린 지난 해를 거울삼아 신년이야말로 깎고 다듬어서 새롭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도록 신해의 신에게 경건히 재배드린다. [임창순(태동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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