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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원 파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백의의「가운」을 벗어 던지고 간호원들이 총파업을 벌인 지난 9월, 10월의 의료계 소동은 의료계 자체뿐만 아니라 전 근로 사회에의 충격이었다.
간호원 파업은 바로 병원의 마비. 비록 근로조건 개선요구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인술의 포기란 수단은 백의의 사명에 대한 적신호임엔 틀림없었으며 당연히 간호사명의 한계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포기와 같은 극한적인 반발 현상은 일부 사회의 근로조건이 폭발 점에 이르렀음과 상대적으로 개선 투쟁 또한 적극적인 것이어서 그 반향은 착잡하기만 했다.
평화 시장에서의 분신 소동도 이와 관련, 하나의 비극으로 나타난 것인지 모른다.
간호원 파업소동은 인술이란 사명과 간호원도 생활인이라는 입장을 당연히 마찰시켰다.
9월25일 과업을 벌인 서울대의대 부속병원과 9월24일과 10윌3일 두 차례에 걸쳐 과업을 벌인 국립의료원 간호원들의 주장은 한마디로『대우없는 곳에 사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밝힌 대우는 4년 제 대학을 나와도(5급을) 본봉이 1만4천여 원, 수당이 2천 원, 모두 1만6천여 원에 불과하며 세금 등 각종 공과금을 제하고 나면 윌 1만3천 원이 될까 말까 하다는 것. 특히 박대도 하루 23원85전의 식사비에 이르러서는 기가 막히다 는 것.
그래서 간호원들은 ①직급을 개편, 5급을 4급으로 올려 주고 ②수당도 1만원∼2만원 선으로 올려 달라고 요구, 보따리를 싸 들고 병원을 이탈한 것이다.
사실 간호원들의 대우는 형편없는 것으로 이것은 이직 율에서도 나타난다.
의료원의 경우 지난해에 정원 2백44명중 70%에 해당하는 1백57명이 사고를 냈고, 서울대병원도 51%가 병원을 떠나 일반병원 등으로 옮겨갔다.
또 간호원 결원을 봐도 알 수 있는 일. 현재 전국의 국-공립 병원은 정원 1천5백6명중 3백61명이 모자라고 시-도립 병원은 4백86명중 1백6명, 보건소는 4백76명중 1백12명이 부족하다. (보사부집계)
따라서 간호원들의 파업소동은 생활인이라는 입장에서. 충분히 수긍되는 것이었으나 인술이란 측면에서는 문제를 던져 줬다.
이화여대 부속 병원장 이명수씨는『어떠한 경우라도 환자를 버린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으며, 적십자 병원장 송호성씨와 성심병원장 윤덕선씨도『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며「선 인술 후 대우」(선 인술 후 대우)를 강조했다.
파업당시 서울대병원과 의료원의 기능은 완전 마비, 수술은 물론 모든 입원이 거절됐고 심지어 급한 교통사고 환자와 중 외상환자가 치료를 못 받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지는 사태까지 낳았다.
그중 파업이 거세게 번진 의료원에선 간호원 대신 중환자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10여 경환자들이『우리는 파업의 희생이 될 수 없다』는「플래카드」를 내걸고「데모」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서울대 의대 간호 과장 이귀향씨는 시대 조류로 보아『한번쯤 있어야만 될 일』 로 분석했다. 이씨는『이미 간호 직은 과거와 같은 기독교식 무조건 봉사에서「프로패셔널」(직업)로 성격이 바뀌어 졌다』며『병원 마비는 유감이지만 부득이한 진통』으로 풀이했다.
간호원들의 사명과 직업인으로서의 대우 요구는 이렇듯 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팽팽히 선후의 견해가 맞서는 미결의 장. 보사부의 파면 엄포와 병원 당국의 예산이 허락되는 대로 처우를 개선해 주겠다는 다짐으로 일단 소동이 누그러졌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개선이나 예산 조치가 없는 만큼 파업은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는 셈.
그러나 문제는 병원 마비와 같은 파국적인 근로 조건 개선 투쟁이 잇달아 일어난 현상이다.
11월13일 하오 서울 중구 을지로6가 평화시장에서의 재단사 전태일씨(23)의 분신과 12월21일 밤 미복 노조원들이 뒤따라 분신을 기도한 소동이 그 대표적. 전씨 등도 시장 안 피복 공장의 환경 개선을 부르짖다 이루어지지 않자 그와 같은 극한 투쟁으로 나간 것. 고려 대 법대 김진웅 교수(노동법)도『병원 마비, 분신과 같은 잇단 극한투쟁이 노동운동의 흐름이 될 우려가 있다』고 경계했으며 서울대 법대 김치선 교수(노동법)는『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로 근로 조건을 개선해 나가는 관행의 수립』이 지금처럼 절실히 요청될 때가 없다고 했다.
아무튼 일련의 대우, 노동 조건의 환경 개선, 투쟁 사태는 일부 근로 사회의 불만이 폭발 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준 것으로 노동 운동의 새 불씨로 등장한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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