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남<한양대 사대학장>|물질사회의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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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는 물질의 세계로서 마음의 세계에 살 여지가 없을 만큼 인간생활이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다. 흔히 남이 쓰니까 나도 쓴다는 식의 비자주적인 컴퓨터사용의 유행은 바야흐로 세계사의 기원을 BC·AD에서 BC·AC로 바꾸어야 할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후자의 BC는 비포·크라이스트가 아니라 비포·컴퓨터이고, AC는 애프터·컴퓨터의 약자이다.
하기야 컴퓨터는 다른 기계나 인간행동에 어떤 순서를 줄 수 있는 정보를 얻기위 하여 가동시킬 수 있으며, 그 정보에 의하여 가장 복잡한 시스템인 사회의 동향까지도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필요한 것을 빨리 필요한 곳에 될 수 있는 대로 값싸게 공급하는데 필요한 순서를 신속히 알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컴퓨터를 가동시키려면, 그 회로의 움직이는 순서가 기억장치상의 상태로서 미리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컴퓨터는 이처럼 외부에서 정보를 제공한대로만 움직이고, 아무리 정교한 것이라도 그 주어진 것 이상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사람과 다른 점이라도 이만저만 다른 게 아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아도 마음에 따라 행동이 변회 되나 컴퓨터에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흑막인 인간이 주는 정보대로 밖에는 아무 것도 못한다. 단추 하나로 모든 게 척척 풀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정보를 가르쳐주고 그대로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컴퓨터시대의 정체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감정도 있고, 이성도 있고, 의지도 있다. 그래서 미리 행동의 순서를 정해놓아도 그대로 되지가 않는다.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이 감정과 이성과 의지의 리그전이 벌어져서, 처음에는 안 하기로 했다가도 나중에는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천사 같기도 하다가 어떤 땐 동물처럼 행동할 적도 있다.
인간은 무슨 행동의 순서를 결정할 때에 우선 어떤 목표를 찾고, 그 다음에 그 목포를 향하여 행동의 순서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찾아서, 그 결과를 이용하는 고도의 학습을 통하여 언제나 발전적이고 보다 복잡한 순서를 얻는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기 혼자서 일방 통행 적인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독특한 것이 된다.
그라고 이 상호 커뮤니케이션이란 것은 현대상면하고 있는 그 사람들끼리의 것만도 아니요, 수백 수천 년 전의 인물·사상·역사·전통과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대를 초월하여 상호 전달할 수 있고 과거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BC·AC가 세계사를 바꾸어 놓는다해도 인간형성에 있어서 인간끼리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중대한 구실을 대치할 컴퓨터가 나올 것 같진 않다.
결국 사회가 물질화해갈수록 정신생활의 가치는 더 중요했으면 했지, 감소 될 리는 없다. 우리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얼빠진 사람이 안되도록, 기계인형이 안되도록 물질사회의 정신을 바로 잡아가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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