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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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사랑은 이마를 스쳐가는 향내음으로
두 가슴을 적시어 합치게 하리라

-모윤숙

소쩍새는 피울음을 운다고 한다. 짝을 부르는 새 소리를 사람들은 운다고도 하고 지저귄다고도 하고 노래한다고도 한다. 그 새가 되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밤낮으로 슬프게 노래한 영운(嶺雲) 모윤숙 시인이 있다.

영운은 1910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북간도의 명신여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31년 서울 배화여고로 옮기면서 월간 '삼천리'기자, 중앙방송국 기자로 일한다.

이해 12월 '동광'에 시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그는 시단의 꽃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내면서 눈부신 빛깔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문학으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당대 가장 웃어른이었던 춘원(春園) 이광수는 '빛나는 지역'의 서문에서 "여사는 조선의 땅을 안으려 하는 시인이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허리를 매고 조선의 제단에 횃불을 켜놓으려 한다고 외치는 시인이다"고 치켜세우면서 "조선의 시인인 것을 감사하려 한다"고 영운을 크게 반기고 있다.

그 영운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 남자를 만난다. 이미 아내가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을 날마다 일기장에 쓰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움, 슬픔, 외로움, 아픔의 말로 띄운다.

아프리카의 깊은 숲속에서 혼자 우는 '렌'이라는 새를 영운은 자기 이름으로 한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옛 이름 '시몬'을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으로 한다. 빨리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어버리고 후회도 반성도 할 줄 아는 남자가 시몬이고 그것이 한국 남자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39년 어느날 조지훈이 영운을 찾아와서 일기와 서간문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영운은 남에게 보이려고 쓴 글이 아니라며 거절했으나 조지훈은 끝내 그 원고들을 뺏어다가 자신이 관계하는 안국동의 일월서점에서 39쪽짜리 '렌의 애가(哀歌)'를 출판한다.

'렌의 애가'는 닷새 만에 매진됐고 나머지 일기도 읽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유진오는 '렌의 애가'가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찬사를 던졌다. 그러면 영운이 그토록 영혼을 태우고 몸을 태우며 부르는 시몬은 누구인가.

그는 "연령이 높은 스승격인 분에게서 신비로운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36년 시몬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일기장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시몬이 혜명이란 남성을 소개해 주어 결혼하게 되는데, 렌은 시몬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혜명에게서는 느끼지 못하고 결혼을 파탄으로 이끈다.

바로 이 내용이 세간의 궁금증을 더하는 것이었다. 영운에게 남자를 소개한 것은 춘원이었고 영운 자신도 파경을 했기 때문이다.

영운은 "구구한 억측도 많지만 난 그대로 침묵할 뿐"이라면서 "시몬과 렌의 정신적 결합은 결코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니 세상이 아는 그대로 자백해도 좋다"고 뒷날 밝히고 있다.

'렌의 애가'는 춘원의 '사랑'과 더불어 서구의 어떤 고전 못지않게 지난 시대 이 땅의 젊은이들 머리의 등잔불 심지를 높이던 필독서였다. 90년 팔순의 나이로 슬픈 노래를 못다 부르고 간 영운, 지금은 어느 숲에서 피울음을 울고 있는지?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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